지난 50년 동안 우리가 변해온 것은 말할 수 없는 변화입니다.
그러니까 전 세계가 굉장히 많이 변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변화 속에서 대한민국을 보면 우리가 그 중에서 제일 많이 변했습니다. 엄청 변했죠.
저는 변화를 생각하면 우리 어머님을 생각해요. 지금 83세인데 한국 나오면 얘야 "이게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우리 순천에 이제 제가 우스개로 그러죠. 우주의 중심 순천.
거기 우리 순천 집 앞에 보면 다니는 차가 고속도로보다 더 다녀요.
삼십 년 전에 제가 어릴 때 버스가 네 대가 들어왔다 나갔거든요. 비포장도로.
그래서 이제 얘야 너무 정신이 없다. 내가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그 어머님을 위로하냐면 어머님 "한국 노인들도 정신없어 합니다.
어머님 너무너무 그 변화를 받아들이질 못하고. 이게 너무 너무 변했기 때문에 그걸 적응을 못합니다.
그래서 뭐가 변했는가 얻은 건 99가지죠.
우리가 옷도 더 잘 입고 좋은 차 타고 다니고 따뜻한 집에서 살고
그러니까 뭐가 변했는가 하면 정이 좀 없어졌단 말이에요. 그렇죠.
그리고 가족도 변했고 그때는 우리 어머님 같은 경우에 열둘을 목표로 하고 애를 낳기 시작했답니다.
그래가지고 이제 반밖에 못 채웠어요. 여섯밖에 안는데.
이제 제가 그중에 이제 막내인데 이제 우리 형 수술하고 제왕절개로 하혈을 많이 하셔서 제 수술하고 낳았는데
그다음부터 외과 의사가 다시 못 낳는다고 얘기해서 울었답니다. 더 낳고 싶어서
근데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제가 나오게 됐는데 그거는 이제 조크로 꼭 나와야 될 사람이 나왔는지 나오지 말아야 될 사람이 나는지 하여튼.
그 우선 아마 시청객은 잘 모를 거예요. 특히 호남이나 지방에 있는 분들이나 조금 알까
그래서 우리 집안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해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우리 집안은 남북전쟁에서 패배한 쪽입니다.
그러니까 소위 남북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이런 영화 보면 이제 남부가 많이 부각이 되죠.
그런데 거기서 그 전쟁이 끝나고 1895년도에 우리 진외교부가 제물포 땅을 처음 밟았어요.
그래서 남장로교 선교사로 왔는데 서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냐 하면 한국을 좀 사이좋게 나누자.
그래서 호남 지역에 남장로교인들이 호남 지역에 가서 선교하는 걸로 이렇게 가닥을 잡아갔어요.
그래서 그분들이 이분들이신가요?
예 우리 그건 이제 알렌이 있고 여기에 이제 우리 유진벨 외중조부 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흔치 않은 사진입니다.
왜냐하면 그 북장로교가 남극장 알렌하고 언드워드는 연희 전문학교 하고 세브란스 의전원
유진벨은 호남으로 동학 사건 일어난 그 골치 아픈 데로 좀 가서 잘해봐라.
그래서 사실 110여 년 동안 호남 사람들하고 아주 잘 지냈습니다.
혼자 있는 이유는 우리 할머니를 안고 있어요.
저분이 박사님 할머니세요.
안고 있는 아기가 그런데 돌아가신 지가 30년 넘 할머니 어머님이 34세 첫 희생자로 목포에서 돌아가셨어요.
아 그래서 지금 할아버지가 혼자 안고 있는 그런 자리입니다.
정말 귀한 사진.
그런데 이제 가끔 이제 이건 텔레비에서 얘기해도 될지 몰라도 가끔 양키 고홈 이런 얘기를 하는데 사실 우리 집안은 남부 출신이다. 북부 이제 군인이 양키거든요. 우리 집안 조상들은 그 리 기병대의 싸움에서 양키를 많이 죽였거든요. 그래서 그 말을 저한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집에 안 가시고 한국에 계속 계신건가요?
글쎄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이제 어린 시절을 동네에서 컸는데, 그 동네에서 큰 추억이 많아요. 초가집이 많았어요.
지금은 초가집이 없잖아요. 이 사진은 우리 부친 모친이에요.
영화 배우처럼 한 장면 같은 애수라든가 이런 영화 같아요.
아들이 좀 닮아야 되는데, 그게 좀 그래서 54년도에 전쟁이 끝나고 순천으로 내려갔는데,
우리는 뭘 모르고 우리 큰 형님들을 다 한국 학교에 넣었어요.
그런데 그 큰 형님들이 한국 학교 다니면서 불행하게도 사실 셋 다 결핵을 앓았어요.
그래서 이제 우리 밑에 아이들은 홈스쿨링 같은 거 하고, 우리 형님들은 결핵 치료를 하고, 결국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재미있는 이유인데, 한국 학교를 지속적으로 다니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미국을 안식년 돌아가는데, 우리 큰 형님 셋이 영어를 못하는 거예요.
영어를 못해서 이제 집에서 교육에 대해서 조금 시작을 했는데,
외모는 이러신데. 영어를 못하니 참 그러셨겠어요.
미국에 갔는데,
3학년 담임 선생님이 불러가지고 "얘 영어 실력이 유치원도 안 된다. 큰일 났네."
그래서 전라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다른 선교사가 외지니까 다른 선교사 자녀들도 없고, 그러니까 매일 학교만 끝나면 남북교 북국민학교 앞에 가서, 그때 제 친구들이 기다리는 건 그 앞에서 기다리는 거예요.
그러면 나오면 그 당시에 옥수수 빵을 줬어요.
교에서 그것도 나눠 먹고, 그리고 집에 오고 그렇게 컸습니다.
근데 대전 외국인 학교를 떠나면서 학교에 가서 엄청 울었는데,
부모가 보고 싶어서 우는 게 아니라 친구가
이런 친구들. 저는 용기고 이쪽은 인순이 누나인데, 누나입니다.
아니, 소장님 옷에 때가 좀 꼬장꼬장하게 묻은 것 같네요.
우리 직원들이 미국 거지가 와서 이거 못 붙이게 한다고.
저렇게 컸어요. 컸는데 이제 어느 정도였냐면,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이제 제가 교육 얘기를 좀 할려고 그래요.
근데 미국의 교육은 키친 스토브 문화가 있었어요. 키친 스토브 문화가 뭐냐 하면,
문건이 난방을 다 하니까 모든 사람이 그 부엌 난로에서 모이는 거예요.
방은 5도밖에 안 되고, 냉장고 온도예요.
근데 그런 교육을 어디서 했냐면, 노인들이 다 모든 집안 사람이 부엌에서 뭐예요,
우리 아버지 시대가 그랬답니다.
그다음에 한국은 우리가 어디서 모였냐면, 온돌방에서 모였어요.
추운 겨울날 밤, 테레비도 없고, 이 테레비가 사실 큰 문제예요.
아니, 티비에 나오셔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참.
그래서 그 심을 때는 언제고, 노인들이 걷을 때는 언제고, 또 인간의 덴데미는 뭐고, 여수 순천 사건은 어떤 거였고, 6.25 때는 어떻게 지냈고, 이런 것들을 안방에서 아랫목에서 가르켰어요.
그리고 저는 형제들한테 그렇게 두들겨 맞았거든요. 맞고 들어오면 "얘야, 내가 이제 할머니 누가 때렸어요?" 막 풀어놓으면 급매, 급매가 뭐냐 하면, 이 지금 지내놓고 보니까 뭐냐 하면, 부정도 아니고, 긍정도 아닌 할머니가 그냥 "글쎄, 말이다." 그렇죠. 그래서 이제 그렇게 해서 받았는데,
이제 조금 더 커서 외국인 학교를 가는데, 이제 거의 "너는 미국에 가서 1년을 지내라"고 강제로 하셨어요.
그래서 학교를 1년 다니다가 돌아와서 연세대학교를 입학했는데
참, 산너머 산이었습니다. 입학해서 몇 달 지났는데,
광주항쟁이 벌어져서 저는 5월 25일쯤 될 거예요.
주일날, 일요일날 광주를 호기심이 있어서 한 번, 친구 하나, 서울대학교 친구, 그때 다녔던 물리학과 다녔던 친구랑 둘이 바리케이트를 하여튼, 무슨 검문소를 7개가 통과해서 어렵게 들어가는데,
이제 거짓말을 했죠. 제가 미국 대사관 직원이다. 영어를 한국말을 못한 척하고, 이 친구는 통역하고 그렇게 해서 이제 쭉 들어가서 아주 긴 얘기를 짧게 말씀드리면, 거기에서 통역을 했어요.
도청 3층에서, 소위 그때는 반란군이라고 했죠. 참, 어이가 없는 얘기죠.
이게 우리의 가장 큰 도전입니다.
아이들 교육이, 미안하지만 폭행해도 괜찮다 뭐 범죄해도 괜찮다 공부만 잘해라 이렇게 돼버렸잖아요.
그러니까 어른과의 접촉 시간이 별로 없어요. 이게 큰 문제입니다.
인간 교육이 우리 아버지는 저를 어렸을 때 또 어떻게 키웠냐 하면 얼마나 엄격했는지 몰라요.
그 요즘 아이들 우리 애는 나한테 그냥 편하게 생각해.
그냥 어제도 기어 올라오고 뭐
근데 그러지 않았어요. 옛날에
그래서 이제 무슨 공부나 소요리 문답이나 이런 걸 외우게 할 때
아버지가 회초리 가지고 우리를 때렸는데 우리 집에 전도사들이 가끔 이 가끔 애가 자주 들랑거렸죠.
근데 그냥 저를 보고 이놈이 이놈이 그 기억밖에 없어요.
이놈이 이놈이 그래서 혹시
내 성이 이고, 이름이 놈인가 그렇게 그냥 누가 들어오면 이놈이 이놈이
그 다음에 그 의학과 1980년도 입학해서 3월 초에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데 기차 정거장에 까만 고무신을
저 사진은 아까 하얀 고무신이 나왔는데 그게 잘 떨어진대요.
그래서 이제 검은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결국 교통사고가 나서 광주 중간쯤 가서 차에서 이제 운명을 하셨는데
장례식 때
자네, 전주 예수병원 원장님이 외국인이에요. 그 당시에는 와가지고
자네 아버지는 한국 사람처럼 살았고 한국 사람처럼 돌아가셨네.
굉장히 기분이 나빴어요. 근데 왜냐하면 왜 그런 말을 하나?
근데 나중에 우리가 그 제가 살아가면서 생각해 보니까 그 검은 고무신을 신고 제가 의외과로 떠날 때 정거장에 나와서 난 창피해서 다른 친구 아버지가 그 친구들이 그 볼까봐 그렇게 너무너무 창피스러웠지만 지금 자랑이거든요.
엄청난 자랑이에요. 근데 그다음에 이제 졸업하고 우리 아버지가 너는 너무 한국적이다.
너는 너무 미국을 모른다. 그래서 강제로 이제 거의 너는 미국에 가서 1년을 지내라.
그래서 학교를 1년 다니다가 돌아와서 연세대학교를 입학했는데 참 산너머 산이었습니다.
입학해서 몇 달 지났는데 광주항쟁이
광주 민주화 운동을 그
벌어져서 저는 5월 25일쯤 될 거예요. 주일날 일요일날 광주를 호기심이 있어서 한 번 친구 하나 서울대학교 친구 그때 다녔던 물리학과 다녔던 친구랑 둘이 바르케이트를 하여튼 무슨 검문소를 7개가 통과해서 어렵게 들어가는데 이제 거짓말을 했죠.
제가 미국 대사관 직원이다. 영어를 한국말을 못한 척하고 이 친구는 통역하고 그렇게 해서 이제 쭉 들어가서 아주 긴 얘기를 짧게 말씀드리면 거기에서 통역을 했어요.
도청 3층에서 그 소위 그때는 반란군이라고 했죠.
참 어이가 없는 얘기죠. 시민군인들 시민들 통역을 3시간을 했어요.
그러니까 외신 기자들이 거기
외신 기자들 다 앉아 있고 열심히 통역하고 그날 하루 그러고 나왔는데
아버지하고 밤새도록 토론을 했어요.
이게 알려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일어나는 일을.
나는 다시 들어가서 또 통역하겠다.
어쨌든 한 2주 지나니까 사법경찰이 따라다니게 되고 대사관에 급히 소환됐는데
데모 주동죄로 한국을 좀 떠나달라.
그래서 참 힘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대사관에서 이제 나가라는 통보 듣고 나오면서 우리 아버지가 어 한국인들은 용서도 잘하고 잘 잊어버린다.
니가 지금 죄는 없지만 죄 있는 걸로 돼 있으니깐 이렇게 조금 지내보자.
그래가지고 좋은 조언을 받고 이렇게 지냈습니다.
근데 제가 이제 그런 일을 겪고 나서 이제 연세대학교를 다녔는데 연세대학교 공부가 엄청 힘들었어요.
굉장히 힘들고 한국의 수재들입니다. 그래서 이제 뜻이 있어서 6년을 공부하지 않고 7년을 공부했습니다.
좀 낙제를 한 번 했다 이 말이야.
뜻이 있으셔서 1년 더
그런데 이제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거 제가 이제 여러 정말 모교에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낙제해서 그만둘까도 하고 별 좌절을 했는데 낙제를 해가지고 다시 교실에 들어가서 똑같은 교실에서 강의를 듣는데 저를 굉장히 사랑을 많이 주신 박경아 교수님이 이제 조직학 강의를 시작했는데
고개 푹 숙이고 있는데 강의 시작하니까 들어야죠.
고개를 들었더니, 세상에 주변이 다 친구야. 서른여섯명이 낙제했더라고요.
그래서,
그 당시에 뜻 있는 분들이 많으셔서
그날 그냥 저녁에는 이제 파티가 벌어졌어요. 니도 낙제했냐 나도 낙제했다.
그래서 지금 병원의 세력이요 대단합니다. 왜 ? 입학 동기 졸업 동기 낙제 동기
사실이에요.
그래서 이제 의대 첫 두 해는 힘들었어요.
81, 82년은 이제 형사 같은 거 자꾸 따라오고 뭐 집사람하고 결혼한 것도 좀 숨기고
그래서 이제 또 그 과정을 지내느라고 공부 때문에 정신이 없었죠.
그래서 이제 저희 지금 집사람을 이제 캠퍼스에서 만났는데 치의예과 학생이었어요.
그래서 이제 이제 본격적인 만남은 아니고 이제 몇 번 만났는데 상당히 멋있죠 이 결혼식인데 벌써 이 여자하고 입을 덮고 산 지가 29년이 됐습니다.
근데 이제 수련이 마치고 미국을 가서 훈련을 받기 전에
1984년 4월 10일날 저희 아버지가 집 앞에서 교통사고가 났어요. 이제 저러니 이제 사고가 났는데 이웃 주민들이 순천에 옮겼는데 순천병원에서 그 큰 병원 가십시오.
부축하고 걸어서 나왔답니다. 그래가지고 광주로 가는 도중에 이제 차에서 운명을 했어요.
그래서 의과 공부를 마치고 또 수련을 마치고 들어오면서 이제 이 아버지 친구들이 보내준 돈으로 엠블런스를 한번 만들어 봐야 되겠다. 대한민국 엠밸런스 그렇게 저렇게 처음에는 굉장히 무슨 냉장고 아이스크림 차 같죠 저렇게 만들어 가지고 이제
92년도부터 그걸 만들어서 보급시켰는데 지금 한 3천 대 정도 보급이 됐습니다.
그래서 그 이제 97년도에 우리 형님이 북한 결핵 퇴치를 좀 해야 되겠는데 좀 같이 가자
그때는 식량 공급을 했죠 처음
그래가지고 어머님을 모시고 그 미국 사람 어머님이 96년도에 호암상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 호암상 돈을 가지고 이제 어머님이 엠밸런스를 하나 사서 우리가 97년 1월달에 그 만수대 앞에서 북한 외교부 장관 그 당시에 김영남 외무성이죠
그분한테 기증을 하는 자리에서 어머님이 소박한
어떻게 해서 왔느냐? 아이들을 이렇게 전라도에서 남편 따라와서 키우다가 애들이 셋 다 결핵 걸렸고 또 84년도에 제가 남편을 잃었는데
남조선에 미안합니다. 이제 이렇게 표현을 해야 됩니다. 그런 남조선의
우리 그 아들이 엠밸런스를 이렇게 개발을 했는데 거기에 119하고도 일을 많이 했는데 북쪽에 앉을 이유는 없고 이거 똑같은 생각으로 하나 한 데 가지고 왔습니다.
야 세상에 오찬이 만찬으로 변했어요. 그냥 바로 그 자리에서
그리고 공문이 북한 정부로부터 딱 떨어져서 우리 사람들 결핵 좀 치료해 달라.
남쪽에서 어머님이 결핵 치료 요양소를 40년 지금 운영해 왔거든요.
그럼 그때도 지금도 이제 북한이 어렵습니다만 결핵이라든가 그런 게 그때도 아주 심각했던
그렇죠 그러니까 이제 그때가 이제 97년이니까 95년 96, 97 그때가 북한이 제일 자연재해 때문에 어려울 때예요.
그래서 전염병이 확산이 되고 그래서 한 6년 동안 형님 따라서 이제 유진벨재단이라는 걸 만들어 가지고 북한 결핵 퇴치를 했는데
제가 이제 계속 연관된 얘기입니다. 남과 북.
그래서 이제 북한 사람이 개성에서 차를 타고 올라오는데 저보고 앞에가 아주 차 앞이 굉장히 시끄러웠어요.
도요타 차를 타고 올라오는데 그 고속도로에,
남조선이 우리보다 좀 앞섰다는데 좀 얘기를 해보라고
그래서 여러분들한테 내가 오늘 들려주고 싶은 거는
우리가 앞으로 나가야 될 길을 알면 그 눈부시게 지나간 옛날을 좀 생각을 해봐야 돼요.
어떻게 해서 우리가 이렇게 됐는지 그래서 제 그날 남조선이 앞선 이유는 박정희와 재벌이 있었다.
이렇게 대한민국을 그러면서 정주영 알지 않느냐 그분들이 정주영 회장을 잘 알아요.
그리고 이제 정주형만 있는 게 아니라 이병철이라는 분도 계셨고 박태준도 계셨고 이렇게 해서 내가 강의를 했어요.
그다음에 재벌 바탕이다. 두 번째 한국 근로자 때문에 이렇게 잘 산다.
아유 그럼요. 그럼요.
그 근로자들이 구로공단에서 섬유업을 했는데 열여섯 시간씩 일했다.
엄청난 희생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잘 살려면 자본을 모아야 되는데 이 남조선 이 우리 남한 사람들이 이렇게 고생을 했다. 여자들 근로자들 심지어 여자들이 머리카락까지 팔았다.
이렇게 해서 자본을 모았다.
그다음에 세 번째 발전하게 된 까닭은 우리 어머님들 때문이다.
우리 어머님들이 근면 절약정신 이 우리 어머님들이 이 엄청난 것을 해냈다.
교육, 지금은 이제 교육이 조금 지나치지만, 그거를
열심히 설명을 해줬어요. 그러면서 40분 동안 그 주제에 대해서 얘기를 했는데 다 듣고 나더니
북한 사람이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요. 줄 잘 섰디 뭐
그래서 내가 줄을 잘 서요. 자세히 물어봤어요. 뭔 얘기 알아듣지 못했어요. 그랬더니
그 북조선은 북한은 러시아 소비에트 뒤에 줄을 섰고 남조선 아이들은 미국 뒤에 줄 서서 그렇지 그렇게 생각그래서 제가 선생님 하나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필리핀은 미국 뒤에 100년 전에 줄 섰는데 왜 저렇게 어리없죠 그것이 한강의 기적입니다.
남조선 사람들이 남쪽 사람들이 스스로 해낸 겁니다.
굉장히 분위기가 좀 싸늘해졌어요. 근데 좌우간 미국에서 제가 봤는데요.
수련 과정 하면서 한국 사람들 대단합니다. 이민오면 특별히 굉장히 대단한 무슨 뭐 학벌을 가지고 이민 온 것도 아니고
언어 장벽을 뚫고 1년이면 차를 사고 5년이면 집을 사요.
근데 5년 만에 집을 사는 것은 미국 사람들이 30년에 못 해내요. 못해요. 계속 렌트 내고
근데 이제 좀 우스갯소리고 이제 은행에서 융자 내는 게 유식한 말 영어로 mortgage 입니다.
근데 그 전라도 할머니한테 배웠어요. 집 사는 방법
아 그건 문제없어.
쉬운 일이야
그거 그냥 은행에 가서 10% 내고 10% 내고 은행에 가서 모가지 내면 돼.
영어를 아주 전라도식으로 소화하셨군요.
mortgage 알고 보니까 모가지더라고
전혀 엉뚱한 말은 아니에요. 또 따지고 정확한 이 은행이 모가지를 잡고 있는 거죠.
역시 전라도 할머니들이 대단해요. 대단해요.
근데 이제 이제 이런 얘기를 하다 보면 꼭 그 아쉬운 점을 좀 얘기를 해야 돼요.
그 제가 왜 이렇게 사회가 화가 나 있죠? 요새 다
뭐 양극화 국회 안에서 뭐 엄청난 싸움 짓들 하고
제일 가슴 아픈 건 국회에서 보면 타협이 이루어질 수 있는데 안 해요. 죽어도
한 사람이 한 사람 밟고 올라가야 성공하는 것 같고
방 안에 두 명을 넣어놓으면요 죄송합니다.
이거 유태민족하고 제일 다른 점이 그거예요. 유태 민족 단합을 잘해요.
노벨상도 역사적으로 제일 많이 받았는데 단합을 못 해요.
한 방에 두 사람을 넣어놓으면 주류가 있고 비주류가 있어요.
이거 참
그리고 단합을 못하는 문제가 또 뭘로 이어지냐 하면
예를 들어서 당끼리 조금씩 손해를 보고 타협을 하면 다 윈윈으로 갈 수 있는데
말 자체가 영어로 compromise 라는 것은 아주 좋은 뜻이에요.
우리가 둘 다 이기자 근데 우리 우리 정치 세계에서는 타협이라는 게 마치 손해를 보는 건데 그렇지 않습니다.
타협이라는 건 이겨서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될지
참 그다음에 이제 우스개 얘기지만 거북선 역사를 보면 그 거북선을 만들어서 임진왜란 때 외세를 우리 이순신 장군이
다 물리쳤는데 결국 이순신 장군이 감옥에 가게 됐단 말이에요.
그 참 어처구니 없는 나라를 구한 사람이 감옥을 갔단 말이에요.
그 다음에 금속 활자를 보면 독일보다 150년이나 앞섰는데 이게 그냥 한번 들어가서 저 백과사전 한번 읽어보세요.
이게 흐지부지돼 버렸어요. 이게 과연 이 백과사전에 나오는 내용 보면 발견은 한국에서 분명히 먼저 했는데
뒷끝이 별거 없어요.
혹시 저는 그런 생각도 했어요. 그 금속 활자를 만들지 못한 분들이 금속활자 만든 사람을 없애버리지 않았나
이런 점들이,
너무 속상해서 그렇게 생각까지 하셨군요. 그 발명자를 혹시나.
그 다음 이제 한국에 살면서 제가 이제 엠밸런스를 개발하고 전라도 땅에 처음으로 우리가 한 데 가서 우리 집 뒷마당에서 만들었는데 제가 체험하게 된 거 한 가지 좀 비판하고 싶은 거는 안전 불감증이에요.
외국인들이 와서 물어요. 저한테
도대체 한국 사람들 두려움이 없다는 거예요.
내가 웃으면서 그 유전 인자가 없어졌어요.
근데 이 국가가 이렇게 빨리 발전할 수 있었던 까닭도 사실 낙관적이니까 그래요.
여러분들이 여러분 낙관적인지 몰라요. 낙관적입니다.
근데 너무 낙관적이면 또 무슨 생각이 드냐면 괜찮겠지 문화입니다.
그리고
왜들 그렇게 안전에 대해서도 불감증이 있지만 왜들 그렇게 과소평가할지 몰라요.
우리를 앞선 것도 많아요. 우리 병원에 들어오면요 카드가 있어요.
카드 갖다가 놓으면 주차는 어디 돼 있고 진료 보고 나가면서 카드 수납하고 나간 동안에 어느 약국을 지정을 해놓으면 그 약국 거기에서 이미 약을 조절하고 있어요. 그건 미국을 훨씬 앞선 겁니다.
인터넷이 세계에서 우리가 최고입니다.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과거 정권에서 저를 한번 불렀어요. 불러서 이제 문화 개방에 대해서 물어봅니다.
문화 개방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이게 10년도 넘었어요.
그래서 문화 개방이라는 것은 별로 걱정할 거 없을 것 같다.
한국 문화가 굉장히 튼튼하다.
그 엄청나게 튼튼하다. 혹시 이제 무슨 일본에 성문화가 들어올까 봐 이런 걸 굉장히 걱정을 해요.
걱정하지 마라. 걱정할 일이 아니다. 그러고 나서 이 한류 열풍이 난 거예요.
근데 봄에 제가 그 터키를 갔다 왔는데 슈퍼에 가서, 이 콜라를 하나 사 먹으려고 갔더니 여자들이 오지를 않아요.
그 슈퍼 주인 아줌마가 그래서 좀 짜증 날 정도로 아무리 기다려도
뭘 모아서 앉아서 구경을 하고 있어요.
저분들이 뭘 하고 있나 하도 안 오니까 제가 가서 이렇게 가서 이렇게 봤어요.
봤더니 세상에 텔레비 앞에 앉아서 한국 사극을 보고 있어요.
우리 드라마를
그런데 한국 사극을 보는데 왜 그렇게 한국 사람들이 터키 말을 잘해요
한국 배우들이 터키 말로, 더빙을
그러니까 드라마를 심취해서 보느라고 손님이 와도 신경을 못 쓴 거군요.
아니 나 신경 안 쓰는데 너무 재밌게 보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 아내한테 알았는데 이란에서도 그렇게 한국 드라마
그래서 제가 제일 이 교육 개방 무슨 지금 이제 남은것이 교육이 좀 달라져야죠.
뭔가는 달라져야죠. 또 의료도 그렇습니다. 한국 의사들 손재주가 얼마나 좋습니까
근데 안 달라지고 있거든요.
그게 소위 신대원군입니다.
예전에 대원군이 계셨던 것처럼
외국을 너무 무서워하고 까짓껏 나가서 힘겨루기 하면 별거 아니더란 말이에요.
나도 클린턴 만나봤어요. 악수했어요. 부시고는 대화도 나눠보고 카터하고 아산 가서 일주일 동안 집 짓기 운동하면서 지냈는데 그 안방의 교육이 튼튼합디다.
그 앞에서 하나도 떨리지 않고 얘기할 수 있는 건 시골에 순천의 어른들이 잘 가르쳤기 때문에 미국 서양식 교육을 받아서 그런 건 아닙니다.
그리고
한국 여성들이 애를 더 낳아야 돼요. 아이를 더 낳아야 돼요. 가끔 제가 주례를 쓰는데 이 아이를 좀 더 낳으세요.
넷 내지 다섯은 꼭 낳아라고 제가 주장을 해요. 한국 여자들 약하지 않습니다.
뭐 세계적으로는 어떤 선교사가 한 번 와가지고 상당히 진보적인 선교사예요.
한국에 지금은 없죠. 선교사가 한국에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죠.
근데 몇 년 전에 이제 여자 선교사가 왔는데
어쩌고 저쩌고 대화 대화 드디어 나왔는데 한국 여성한테 인권을 가르치러 왔대. 그 여성 해방을
그래서 내가 이미 해방됐는데
무슨 얘기인가 하니, 내가 시골에서 이제 논두렁에서 잘 들으세요.
논두렁에서 어릴 때 교육을 받았는데 보면은 큰 자부, 큰 며느리가 가족에서 요거야
이야. 아 처음에는 그 큰아들 며느리가 들어올 때는
나락이 안 됐다. 애가 잘못 들어왔는가 보다. 누가 아프다. 내가 애가 잘못됐나
사고가 나면 그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서 그렇다. 이거는 작은 예수에요. 며느리가.
근데 아들을 달 갖고는 좀 약하고 아들을 하나 내지 둘을 낳으면은 집안 분위기가 다 바뀌어요.
그리고 남편하고는 이제 서서히 멀어져. 정신적으로 끊어. 이혼을 하고 아들하고 재혼을 해.
그래가지고
그 아들이 결국 모든 비밀을 엄마한테 가서 의논하고
그러니까 환갑까지 남자가 살면 쓸모가 두 개밖에 없어요.
그것이 뭐냐 장례식에 가는 거 하고, 결혼식에 내보내는 거 하고 모든 걸 다 쥐고 있어. 여자가.
그리고 이제 논두렁에서 이제 저는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교회 다니는 여자들은 그런 일이 좀 적지만 또 있을 거예요.
근데 논두렁에서 막걸리 한 잔씩도 시작해. 가끔 담배도 피워요.
그러다가 이제 여러분 다 아시죠? 경주 가는 버스 보셨죠? 흔들흔들하는 거야.
인생은 55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조강지처를 버리지 마라는 구시대 얘기고
조강지부를 버리지 마라.
남편이 불쌍해. 요새
나도 우리 내년이면 우리 집사람하고 30년 살았는데 딸 둘 낳고 잘 살았어요.
이십 년 동안 근데 늦둥이 아들이 나오더니 9년 전에 나왔어요.
눈에 넣어도 안 아파요. 그놈 키우는데 재밌는데
그 난 다음부턴 걔하고 잠자지 걔하고 빨고 핥고, 스님이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여러분 한국 여성은 또 운동 경기하는 것도 봐도 그렇잖아요.
외국 가서 한국 남자들 맨날 야구는 예외 야구 야구는 진짜 멋있게 했어요.
근데 그 외에는 전부 남자들은 얻어 터지고 들어오고 여자는 다 이긴단 말이에요.
야, 그 외국인들이 그래요.
IMF 위기 때 눈물이 났어요.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세상에 이런 민족이 다 어디 가 있나
전부 금 들고 오고, 국가 빚 갚겠다고 요즘 보면 IMF때 그 분위기는 의도로 다 가버리고
밤낮 이 단체하고 저 단체하고 싸움하고 데모하고 뭐 갈등이 있고
그래서 저는 연어가 알을 낳으려고 다시 바다를 나갔다가 4~5년만에 오니까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제자리로 돌아오겠지.
근데 지금이 굉장한 과도기인 것 같아요. 엄청나게 한국이 지금 변하고 있고
한국의 그 불만이라고 그럴까 그 참 엄청납니다.
그러니까 아까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그 아랫목 문화를 다시 좀 되살리고 이런 걸 말씀하시는 거죠?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끈끈한 정의 문화를 어떻게 해서 다시 살릴 건지 또 그 아랫목 문화 저는 또 한국인이라는 것이 세계적으로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이거를 생각해야 됩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저한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어른이
무슨 서양 철학자도 아니고 종교인도 아니고
사실 전라도를 순천에서 우주의 중심이라고 그렇게 얘기하는 건 사람들이 다 웃지만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여수에서 일어난 한 사건입니다.
여러분들하고 정말 놀라운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여러분들한테 꼭 소개하고 싶은 손양원 목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경남에서 태어나 가지고 신학을 마치고 1930년 초에 신사 참배 안 한다고 감옥에 붙들려 갔어요. 광주교도소에
근데 45년 해방이 되고 나와 가지고
이제 우리 김구 선생님이 47년에 내려와서 이제 손양원 목사한테 당신 훌륭하여 끝까지 감옥에서 8년 살았다 나왔으니까 그래서 이제 또 거기 한센스 병, 나병, 한센스병 환자들을 평생 돌봐야 하는데
그분이
김구 선생이 내려와서 서울에 있는 소학교 교장 시킬 테니 올라오십시오. 김구하고 찍은 사진도 있어요.
가보면 그거를 마다하시고 그다음에 여수 순천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이제 제주도를 진압하러 갔던 군인들이 이게 못하겠다 명령을 못 듣겠다 해가지고 순천을 덮쳐서
이제 그 와중에서 손양원이라는 사람의 두 자녀가 무차별 학살이 됩니다.
둘 다 죽어요. 하나 잃은 게 아니라 장남 차남 근데 인류 역사에 그런 일이 없어요.
그 자기 아들을 죽인 동창생을 입양을 해요. 입양을 해서 집에 데려다 놓는데 엄청난 얘기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그다음에 이제 6.25가 나는데 전라도 땅이 이제 전부 북쪽에서 넘어와 가지고 이제 밀고 내려오니까
목사님 대피하십시오, 피하십시오. 그래서 이제 바닷가에 배를 준비해서 부산으로 가라고 준비를 다 해주는데 결국 바닷가에서 한센스 환자들이 다 송별하러 나왔죠. 손 목사가 도저히 못 참아서 배에서 뛰어내려 가지고 바로 체포돼서 여수 구치소를 또 들어가요
환자를 두고 못 간다고 안 가신
들고 할 수가 없죠. 그래서 여수 구치소에 수감돼 있다가 인천 상륙작전 일어나는 동시에
후퇴하는 북한 군인들이 데리고 가서 복숭아 밭에서 총살해요.
그런데 제가 이제 이 어른을 기리고
또 항상 농담으로 순천 여수 지역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한 얘기는
이 사람은 원칙을 지키고 또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제 여러 가지 남북 갈등
또 기본적인 기독교인들은 많은 자기의 신앙을 입으로 떠들지만 실천을 하지 못한 욕을 많이 먹어요.
그런데 저는 여러분들한테 감히 오늘 얘기하고 싶은 것은
손양원 목사가
그 한국인으로서 제가 역사 속에 공부를 해봤는데
제일 훌륭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저의 우상화하면 안 되겠지만 인간이니깐 제 최고 존경하고 존경하는 분이 손양원 목사입니다.
한국이 그 물질적으로는 엄청 발전을 했는데 우리가 사회 분야에 무슨 역사에 이런 거는 이제 투자를 안 했는데
다시 투자를 하고 또 우리 과거를 봄으로써 우리 미래를 알아 나가야 되고 그 뭐랄까요 우리 우리가 갈 길을 저는 한번 생각해 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대한민국 안에서는 가장 제가 훌륭하게 생각하는 것은 119입니다.
직업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직업 근데 119가 원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소방공무원들 저 친구들 그냥 불이 날 때 나와서 끄고 맨날 놀기나 하고 이런 시각으로 보는 게 있었는데 대한민국에 최고고
또 근래에 와서 제가 느끼는 것은 해외에 나가서 사람을 돕는 직업이 최고인 것 같아요.
그게 코이카입니다. 코이카 한국 인력개발원 협력단
예 국제협력 봉사단
국제협력봉사단
제가 그분들하고 한 15년 동안 지금 좀 같이 지내고 이제 외국에서 아프면 들어오는 걸 도와주고 그랬는데
정말 가서 외국에 나가서 그야말로 한강의 기적을 이분들은 가르친 분들입니다.
우리도 사실 많이 도움을 받고 우리 힘을 기른 것처럼 이제 돌려드려야 될 때죠.
제가 예를 하나 들자면 이제 제가 코이카에 참여한 건 없지만
이북에 가서 97년도부터 이제 일을 해왔는데
97년도 좀 지나서 2천년도 정도 돼서 이제 이쪽 평양 중심으로 해서 서해안 제가 안 가본 데가 없어요.
거길 다 다니셨어요 다 다녔습니다. 결핵 퇴치 때문에
근데 여러분들한테
그 마무리하면서 제가 좀 거기서 느낌을 하나 얘기를 해주면 앞으로 우리가 나가야 되는 데 좀 도움이 될 거라고 봐요.
2천년 무렵이에요.
김책이라는 도시로 넘어가는데 김책은 또 함경북도에서 가장 남쪽 도시입니다.
그래가지고 이제 고개를 넘는데 이제 거의 제가 어렸을 때 순천에서 경험한
구례 순천 소련재도 있고 무슨 뭐 여러 재들이 있는데
그거 넘는 정도로 길이 좀 좁고 비포장 도로니까
하여간 열 몇 시간을 달려서 김책을 지나서 몇 분 쉬고 청진까지 가는데 얼마나 피곤한지 몰라요.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고 순천에서 광주까지 우리 어렸을 때 3시간 반 지금 1시간이 안 걸리잖아요.
근데 청진 여관에 들어섰는데 이제 8월 말인데 추워요. 8월 말인데 추워요.
그래서 좀 목욕을 좀 했으면 좋겠다. 좀 씻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대부분 저 아래서부터 올라온 단천에서부터 고개를 한 10개 넘어서 왔기 때문에 굉장히 샤워하고나 씻고 싶은 마음이 있죠. 그래서
그 당시에 얼마나 힘들었냐면 평양 바깥에 나오면 좋은 호텔이면 매일 10분씩 물을 제공을 해줘요.
뜨거운 물을 뜨거운 물을
찬물은 이제 거기 이제 그 전기 사정이 안 좋기 때문에
그 목욕탕 안에 찬물을 받아놓는데 거기는 물이 있어요. 그걸 퍼서 화장실도 내리고 간단히 세수도 하고 이빨도 닦고 그러는데
이거 실화입니다.
목욕을 시작을 했는데 중간에 정전이 돼버렸어요. 아이고 이런 정말입니다. 그래서 막막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땅바닥을 막 기어다니는 거예요.
왜? 방 안에 들어와서 후레시 찾으려고
손잔등
손전등을 찾는데 이게 이제 남쪽 그 슈퍼에서 한 2천 원짜리인데
며칠 써서 희미하기는 한데 가방을 깜깜하게 찾을 수가 있어야죠.
전기 제 여러 가지 재난 자연 재해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이분들이 우리한테 전기를 안 보내주고 이렇게 했어요.
근데 그래가지고
어떻게 어떻게 해서 찾았어요 찾아서 꺼내는데 꺼내는 순간에 꺼냈는데
이 후레시를 이렇게 보고 혼자서 내가 웃기 시작한 너무 반가워서 이게 엄마 만나는 거하고 똑같애.
그 히 웃는 거예요. 이게 빠삐용 영화 보셨죠?
거기서 그냥 너무 반가우니까 그래서 조금 이제 정신 상태가 별로 안 좋구나.
아니 근데 소장님 그때 비누칠은 하신 상태였어요
칠하다가 말다가 그래서 이제 그거를 다시 걸고
그래서 이제 이 막 속도전 목욕을 끝냈는데 너무너무너무 고마운 거예요.
목욕 머리까지 다 감고 헹구었어요. 다 그러고 나오는데 걸어 나오는데 팔자 걸음이에요.
내가 해냈다. 이 도시에서 더운 물로 목욕한 사람 있으면
중간에 정전까지 됐는데
좀 나와봐라. 근데 거기 앉아서 앉아 있는데 뭐 서울 시내에서 무슨 뭐 몇만 원짜리 사우나는
저게 얼마나 개운한지.
그래서 제가 여행 마치고 성공적으로 돌아오고
연희동 3500원 목욕탕에 4500원 사까지 올랐어요.
다시 4000원으로 내렸어요. 기름값이 떨어져서 자
거기 가서 딱 들어갔는데 이 훤해요.
일단 얼마나 고마운지 그다음에 목욕탕 안에 들어가는데 좋은 목욕탕도 아니죠
그냥 동네 목욕탕인데 찬물을 켰더니 그냥 마음껏 콸콸콸 찬물이 나오고
또 더운물을 켰더니 또 더운물도 마음껏 나오고 너무너무 감동을 받아서 벽을 보고 울었어요.
눈물이 나도 모르게 뚝뚝뚝뚝 떨어져요.
아버지 장례식도 못 울었어요.너무 놀래가지고 그 당시에는 그래서
야 참 남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거구나 그 소중한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여러분 교육 얘기가 오늘 많이 나오고 그랬는데 자식 키울 때
제발 우리 감사할 거예요. 좀 혹독하게 키우세요. 야단도 치고 고생도 시키고 미국에서 신문 배달 재벌 애들도 신문 배달해요.
무슨 뜻인 고하니? 우리가요
나가서 누구하고 차 한잔 마실 수 있는 것
내 차 타고 여행할 수 있는 것
이런 데에서 강의할 수 있는 것
겨울에는 더 따뜻한 방에 있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에어컨 켜고
친구하고 하고 싶은 얘기도 하고 이게 감사할 일이요 너무너무 많습니다.
여러분, 아이들 교육시킬 때 좀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게 교육시키고
우리가 이제는 그만 방황하고, 세계하고 경쟁하고, 어려움이 지금 왔는데 정신을 차리고
단합을 해서 사소한 싸움 그만하고 앞으로 나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