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6년 10월 4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6. 10. 7. 13:23



현대 사회는 원 클릭 시대입니다.

한 번의 클릭으로 제품을 주문할 수 있습니다.
결제도 편리하고 배송도 빠릅니다. 

오늘 주문하면 내일 문 앞에 도착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식당은 엄청나게 빠르고 효율적입니다.
미국인들이 한국 식당에 대해서 제일 부러워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종업원을 부르는 버튼입니다. 

미국 식당에서는 웨이터를 부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이제 미국 문화에서 식당에서 여기요 하고 부르는 것은 매너가 아닙니다.
손을 들고 서 있거나 아니면은 웨이터와 눈이 마주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웨이터가 바쁜 경우에는 한참 동안 손을 들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테이블에 있는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바로 종업원이 찾아옵니다.
심지어 테이블에 있는 태블릿으로 주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인들이 한국의 식당 시스템을 엄청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는 이 시대에 인기 없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바로 인내입니다.
현대인 중에서 인내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만 하니까 기다릴 뿐입니다.
인내를 미덕으로 여기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뭐 수험생들이 이 글귀를 써서 책상 앞에 붙여 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죠. 

'사 먹는 열매가 더 달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현대 사회는 인내와 끈기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집중력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학습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뉴스를 여러 차례 보게 됩니다.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을 사용해서 10분 동안 집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어려울 지경입니다.
미국 MIT 대학에서 뇌 인지과학을 연구하는 얼 밀러라는 교수님이 계십니다.


그가 말하기를 인간의 뇌가 멀티태스킹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의 뇌는 한 번에 한 가지 아니면 두 가지 일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특별히 청년들은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 티비 보면서 책을 읽고 동시에 문자와 이메일을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밀러 교수에 따르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뇌의 인지 능력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거 했다가 저거 했다가 저거 했다가 빠르게 전환하는 것입니다.
마치 여러 개의 공을 계속해서 돌리는 저글링과 같은 모습입니다.
멀티태스킹은 여러 가지 일을 빠르게 전환하고 있는 것입니다.
TV 보다가 책을 보고, 문자 보고, 이메일 보고 빠르게 빠르게 우리의 집중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빠르게 전환을 하다 보면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한 가지 일에 오래 집중할 수 없게 됩니다.
여러분 20분 동안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집에 가셔서 20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성경책만 한번 읽어보십시오.
어려운 일입니다. 

원래 멀티태스킹은 컴퓨터 프로세스를 설명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뇌에 해당하지 않는 사항입니다. 

제 말이 아니라 MIT 교수님의 말입니다.
새로운 생각과 혁신은 빨리 생각하는 것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깊이 생각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외부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고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천천히 깊이 성찰하는 시간을 가질 때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어떤 연관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아이디어의 시작입니다. 

물론 속도가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깊이도 중요하지요. 

안타깝게도 속도와 깊이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습니다.
둘 중에 한 가지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차분히 앉아서 깊이 생각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이 빠르게 지나가는 사회에서 어떻게 인내와 기다림의 가치를 말할 수 있을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은 다양한 종류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향한 조직적이고 전면적인 박해가 항상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교회를 향한 대대적인 박해는 한 두세 번 정도 있었습니다.
AD 64년 로마에 대화재가 있었을 때 네로 황제의 박해가 있었습니다.
AD 250년 로마의 황제 데키우스가 칙령을 내려서 대대적인 박해를 했습니다.
그 외에는 간헐적이고 지역적인 박해가 있었습니다.
로마는 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을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황제 숭배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세기 후반 로마는 황제 숭배를 공식화했습니다.
이것은 국가에 대한 충성의 표현으로 이해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황제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 숭배도 하지 않았고, 신들을 위한 제사에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국가적인 재난이나 어려움이 닥치면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초대교회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거나 땅이 곡식을 내지 않거나, 기근이 닥치거나 전염병이 창궐하거나 하면 그들은 외쳤다.
그리스도인들을 사자에게 보내라' 라고 적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모든 불행의 원인을 신들의 노여움으로 이해했습니다.
신들의 노여움을 촉발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1세기 로마 사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안 좋은 일만 생기면 그리스도인들 때문이라고 다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도들에게 필요한 태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내였습니다. 

야고보서 5장 7절 8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아멘.

이 짧은 구절에 길이 참으라라는 말이 단어가 세 번이나 나옵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마크로스메어라고 하는데 문자적으로 오랫동안 고난을 받는다라는 뜻입니다.
인내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고난을 견디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싫어합니다. 

힘들게 살고 싶지 않고 편안하게 지내기를 원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비난받지 않고 그냥 평안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인생에 있어 소중한 것은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농부를 예로 들었습니다. 

농부가 씨를 심고 열매를 거두기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오늘 심으면 내일 열매를 거둘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1년 동안 기다려야 합니다.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기까지 오랫동안 기다려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무더운 여름도 지나가야 하고 비도 기다려야 합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부분에서는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마침내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인내해야 합니다.
공부도 그렇고 운동도 그렇습니다. 

인내하지 않고 금방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 엄청난 인내를 해야 합니다.
최근에 있었던 아시안게임에서 안세영 선수가 2회 연속 금메달을 땄습니다.
배드민턴 단식 역사상 최초라고 하죠. 

안세영 선수는 세계 랭킹 1위를 100주 연속으로 하고 있습니다.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여러분 분야를 막론하고 세계 1위가 되는 것은 엄청난 어려운 일이죠.
그런데 세계 1위를 2년 동안이나 지키는 것은 정말로 엄청난 일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뉴스에 보니까 안세영 선수가 수비를 아주 잘한다고 합니다.
상대가 어떻게 공격해도 그것을 다 받아낸다고 합니다.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선수가 평소에는 2 대 1로 연습을 한다고 합니다.
두 명의 국가대표가 공격을 하면은 혼자서 수비하는 훈련을 한다고 합니다.
평소에 2 대 1로 연습을 하니까 실전에서 1 대 1로 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오랜 훈련과 인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청춘 남녀가 만나서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해서 연애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과 결혼해서 20년 30년 동안 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오랜 기간 지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드는 모습이 있어도 참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부분은 변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은 변하지 않기도 합니다.
변화된 부분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변화하지 않는 부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내해야지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인내에 있어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인내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인내심이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태어나면서부터 겸손한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겸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내도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서 형성되는 덕목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원래 인내심이 부족해라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인내심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훈련을 통해서 인내심을 배우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4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아멘,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라고 말씀합니다.
인내를 이룬 사람은 온전하고 구비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인내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인내를 배웠습니다. 

오랜 박해와 고난 가운데 포기하지 않고 견디는 법을 배웠습니다.
초대교회 교부 그레그리오스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인내는 그리스도인들을 다른 이들과 구별해 주는 우리의 특별한 덕목이다라' 고 말을 했습니다.
1세기 로마 사회에서 인내는 미덕이 아니었습니다.
인내는 영웅의 덕목이 아니라 하층민이 겪는 고통을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어떤 일을 하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형편에 놓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인내는 힘 없고 가난한 노예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인내를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습니다.
박해와 고난이 있어도 오랫동안 참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인내를 이룬 사람은 온전하고 구비되었다 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해서 이럴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살아갔던 사회는 인내를 불명예로 여겼는데, 어떻게 초대교회 성도들은 인내를 덕목으로 여길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이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제시합니다. 

인내는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아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서 오래 참으십니다.
여러분, 이 단어가 야고보서에 나온 길이 참다와 똑같은 헬라어 마크로스메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인내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오래 참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내를 싫어합니다. 

힘든 일을 만나면 피하고 싶어 합니다.
왜 인내해야 하는지 그들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이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인내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인내는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어떤 모습인지 성도들은 그들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어떻게 보았을까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결코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시면서 인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주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장 4절에 봐도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기다릴 수 있는 인내를 가지셨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조급하게 행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인내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천지를 창조하신 분께서 로마 군사들에게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들의 채찍을 맞으셨고, 그들의 침을 맞으셨습니다.
너 자신을 구원해 봐라. 조롱하는 말을 듣고도 주님은 참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충분한 능력이 있는데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 앞에서 참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에게 충분한 지식이 있고 돈이 있는데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 앞에서 잠잠히 있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그분을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이 모습을 초대교회 성도들은 보았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고난과 조롱을 감내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인내야말로 가장 높은 덕목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인내를 보았기 때문에 그들도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박해 앞에서 그들은 참을 수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조롱 앞에서도 그들은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인내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어떠한 고난과 박해 앞에서도 그들은 인내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상황을 빨리 없애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람으로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인내는 하나님의 성품이고, 그 성품을 이루어가는 것이 그들의 간절한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인내를 이루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수도원에 들어가서 금식하면서 수행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아멘. 

성경은 인내와 원망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하면서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서로 원망하는 것은 인내를 이루어 가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내 뜻대로 안 될 때 우리는 원망합니다. 

상황을 원망하고 다른 사람을 원망합니다.
예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원망과 불평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불평은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불평하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작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고,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통치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1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이유는 하나님께 불평했기 때문입니다.
정탐꾼들의 말을 듣고 우리 모두가 다 죽게 되었다고 불평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그대로 행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너의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고 한 것과 똑같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칭찬을 받았던 이유는 그의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가운데 있지만 요은 함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 상황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내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할 때 욥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욥기 2장 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 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유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라.

 

아멘, 

욥은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 있지만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었기 때문에 고뇌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내적으로 갈등했고 의심하는 마음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인격을 갖추었는지, 인내를 갖추었는지, 우리가 그 마음을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을 뿐입니다. 

인내를 구비한 사람은 입술로 범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미국의 팀 켈러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내는 지연된 만족 앞에서도 품위와 흔들림 없는 태도를 지키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멋진 말입니다. 

진정한 인내는 품위와 흔들림 없는 태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즉시 이루어지지 않다고 해도 잠잠하게 기다릴 수 있는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내 삶을 인도하신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기도와 바람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다고 해도 분명히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실 것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인내는 품위와 흔들림 없는 태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내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3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아멘.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입니다.
15개의 헬라어를 사용해서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15개의 단어는 모두 다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고 형용사가 아닙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동작이고 실천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첫 번째 속성은 오래 참는다입니다.
이 단어는 야고보서에 나온 길이 참다와 똑같은 헬라어입니다.
똑같은 단어가 야고보서에도 나오고, 베드로후서에도 나오고, 고린도전서에도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래 참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이유는 그것이 사랑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우리는 사랑 계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위한 첫 번째 계명은 오래 참는 것, 즉 인내를 배우는 것입니다.
인내는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인내해서 좋은 학교에 가고, 인내해서 좋은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인내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가장 중요한 과정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오래 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든 사랑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인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내는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인내하는 것, 어떤 사람에게 인내하는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인내하는 것, 말에 있어서 인내하는 것도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내는 힘든 상황 가운데서 인상을 쓰면서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뜨거운 사우나 안에서 견디는 것처럼 인상을 쓰며 참는 것이 인내가 아닙니다.
인내는 지연된 만족 앞에서 품위와 흔들림 없는 태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나와 함께하시고 이 상황을 다스리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인내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내를 배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인내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좀 안 드는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을 기다려주고 받아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인내와 사람을 향한 인내, 또한 상황을 향한 인내는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면서 지연된 만족 앞에서도 품위와 끈기를 지키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인내를 실천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했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주님께서 오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것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가까이 왔음을 믿었습니다.
본문 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아멘, 

여기서 주의 강림은 예수님의 재림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워왔기 때문에 그날을 기다리며 인내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무언가를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오겠지라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진짜 그렇게 될지는 잘 몰라도 막연한 기대라도 가져야 살 수 있습니다.
기대와 소망이 있기 때문에 고난을 견딜 수 있습니다.
여러분 소망이 없으면 눈앞에 있는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것 something 을 기대하며 기다립니다.
사업이 잘 되고 주식이 잘 되기를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자녀가 잘 되고 사회에서 성공하기를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어떤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something이 아니라 someone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날 날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든지 아니면 우리가 주님께로 갈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소망은 돈이나 성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날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눈앞에 있는 고난을 인내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의 끝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인생의 목적과 목표, 의미와 윤리가 달라진다'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끝을 어떻게 보십니까? 

여러분 인생의 끝에 무엇이 남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인생의 목표가 something이라면 그 모든 것은 다 사라집니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든 성공이든 상관없습니다. 

한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이룬 모든 것은 다 사라집니다.
반면에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가 someone이라면 그와의 관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족일 수 있고, 옆에 있는 성도일 수 있고, 가장 중요하게 예수님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족을 위해 한 사랑, 예수님을 위한 사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까지 인내할 수 있는 이유는 something이 아니라 someone을 기다리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사라질 something을 위해서 오랫동안 인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죽어도 사라지지 않을 someone을 위해서 인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내의 모델로 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욥은 온갖 고난과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켰고 마지막까지 인내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1절 함께 읽겠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아멘.

여기서 결말을 헬라어로 테워스라고 하는데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결말이라는 뜻도 있고 목적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가 욥의 인내를 생각할 때 이 두 가지를 다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결말을 생각해야 하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가지신 목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결말을 알아야지 우리는 이야기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미녀와 야수 이야기를 아시지요? 

야수가 미녀를 사랑해서 매일 청혼을 했습니다.
하지만 미녀는 야수가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야수의 성을 떠났습니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해 보면 이거는 일방적인 스토킹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미녀가 야수의 진심을 알게 되었고 진정한 사랑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마법이 풀렸습니다.
야수는 왕자로 다시 돌아왔고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이야기의 결말을 알아야지 전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내를 배우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결말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마지막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끝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한계시록을 주셨습니다.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권력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원한 하늘의 권력을 바라보기 원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의 핵심 메시지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입니다.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공의로 온 땅을 통치하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우리가 행한 모든 것을 기억하시고 갚아주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 함께 읽겠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

아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길을 택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다가 올바른 길을 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기간 동안 꾸준하게 올바른 길을 택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 유익만 구하는데, 나만 올바른 길을 택하면 바보처럼 보일 수 있겠지요.
그때마다 우리는 욥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결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인내를 온전히 구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훈련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훈련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인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훈련받았기 때문입니다.
훈련된 성도가 인내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훈련된 교회가 인내의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대구동신교회는 교육과 훈련에 특화된 교회입니다.

여러분께서 우리 교회에서 제대로 훈련을 받으셨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길을 선택하되 한 번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평생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에 힘쓰는 자들입니다. 

한두 번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꾸준히 해야 할 것입니다.
오랫동안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인내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름에 거두리라.

 

아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그분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인 인내를 본받아서 주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기억하며 선한 일을 하되 낙심하지 않고 인내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84YIri-6-u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