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6년 9월 13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6. 9. 14. 10:08


여러분의 인생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습니까?
좋은 기억일 수도 있고 나쁜 기억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특별한 사건으로 인해서 여러분의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던 적이 있으십니까?
저에게도 몇 가지 특별한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열심히 교회에 다녔고 예배를 열심히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초등부 여름 캠프에 가서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1인 인형극이 유행이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재미있게 각색해서 인형극으로 했습니다.
지금 6학년에게 인형극이 흥미롭지 않겠지만 당시에 저는 재미있게 그 인형극을 보았습니다.
중요한 일은 인형극 이후에 벌어졌습니다. 

그 인형극을 해 주셨던 분은 외부에서 초청한 전도사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이제 인형극 전문 사역자였는데 기도의 불이 있으신 분이셨습니다.
부자와 나서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인형극으로 해 주시고 기도회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인형극에서 본 것처럼 천국과 지옥이 있고 우리는 원래 지옥에 가야 하는 죄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심플한 복음 메시지였습니다. 

뭐 제가 주일 학교 짬밥이 몇 년이었는데 당연히 그 정도는 알고 있었죠.
다만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형극 이후에 기도회를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단지 인류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나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것이 너무나 확실하게 다가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제 마음이 충만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어린 제 마음에 감사와 감격이 가득해서 기도회 내내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30분을 기도했는지 1시간을 기도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저는 그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예수님의 사랑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셨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저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의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면 저는 항상 출처를 묻습니다.
믿을 만한 출처에서 나온 것인지 팩트 체크를 하는 거죠.
그래서 아내가 무슨 말만 하면 출처를 물으니까 아내가 기분 나빠할 때도 있습니다.
저는 인터넷 자료를 잘 믿지 않고요. 

미국 언론이나 대학 자료를 주로 믿습니다.
논문 쓰던 버릇이 있어서 1차 자료가 정확한지 확인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곡된 주장을 할 수 있으니깐요. 

이렇게 의심이 많은데 예수님의 사랑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너무나 확실하게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날 이후로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날의 사건은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까지 영향을 끼치는 일생일대의 사건이었습니다.

성경에서 기억은 아주 중요한 주제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모습 중에 하나가 바로 기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억하실까요? 

우리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실까요?
우리 믿음이 순수했던 시절을 기억하실까요?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말씀이 창세기에 처음 나옵니다.
창세기 8장에서 노아의 홍수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8장 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너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심에 물이 줄어들었고, 

 

아멘.

이 세상에 죄악이 가득해서 하나님께서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분의 공의로 심판하시는 중에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방주를 기억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성경에서 처음으로 기억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심판 중에도 하나님은 노아를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기억하셨습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홍수가 끝난 이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라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약속을 기억하시겠다고 또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9장 16절에 보니까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들 사이에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을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일정 기간이 아니라 영원토록 그분의 약속을 기억하십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아브라함으로 큰 민족을 이루고 그 자손을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약속을 기억하셨습니다. 

수백 년이 지난 이후까지 그 약속을 기억하셨습니다.
출애굽기 6장 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아멘.

하나님께서 애굽의 종으로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왜 구원하셨을까요?
그들이 착해서 구원하셨을까요?
그들이 불쌍해서 구원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을 강성하게 하고 그들에게 축복을 주겠다라는 그 약속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하신 약속을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일정 기간이 아니라 영원히 기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성경에서 기억은 이렇게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리가 기억을 잃어버리면 단지 과거를 잊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은 과거의 사건을 잊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나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지금의 나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의 총합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기억 상실증에 걸려서 결혼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제 아내가 누구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면 제 아내만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죠.

제 딸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아내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딸을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결혼한 이후에 20년 동안 있었던 일을 다 잊어버리면 제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버지로서의 정체성, 남편으로서의 제 정체성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제가 잊어버린 것은 과거의 기억이지만 그로 인해서 현재의 정체성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앤드류리 월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것은 우리의 과거이다. 우리의 과거가 사라지면 우리는 길을 잃게 된다' 라고 말했습니다.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과거와 우리의 정체성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과거를 잃어버린 사람은 인생에서 길을 잃게 되고, 그렇게 되면 어떠한 방향도 없이 어떠한 확신도 없이 헤매이게 됩니다.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치를 이렇게 말했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중요하고 국가적으로도 중요합니다.
특별히 성경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과 사랑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을 기억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제대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5장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이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내게 명령하노라.

 

아멘.

하나님께서 두 가지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과거에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없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았었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죄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하고 고통스러운지 기억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속량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속량. 영어로 redemption 은 값을 치르고 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짜로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값을 치르셨습니다.
구약의 유월절에 어린 양이 대신 죽임을 당했습니다.
신약의 유월절에는 예수님께서 대신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공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대가를 치르시고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신명기 전체의 주제가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할 때 내 인생에 어떠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과거와 우리의 정체성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세기에는 모든 종교에서 희생 제사가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는 많은 신들을 섬기는 다신론을 따랐습니다.
곡식을 심을 때에는 추수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장사를 할 때에는 장사의 신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결혼할 때에는 사랑의 신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정기적으로 재물을 드렸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번제와 소재, 화목재 등을 드렸습니다.
1세기 사람들에게 예배의 핵심은 바로 희생 제사였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기독교에서만 희생 제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기독교의 예배에는 제사가 없었습니다.
초대교회 예배의 중심에는 말씀과 성찬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예배 모습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 성경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세.

말을 밤중까지 계속 하에 떡을 떼려 모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밥 먹으러 모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떡을 뗀다 하는 것은 성찬식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이 모여서 함께 성찬식을 거행했고, 그 이후에 바울이 성경을 강론했습니다.
초대교회 예배의 중심에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강론은 들리는 말씀이고 성찬은 보이는 말씀입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말씀 중심의 공동체였습니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신 예식이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억하며 성령 안에서 주님과 연합하게 되는 예식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성찬의 의미와 유래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3절, 24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네 가지 행동을 하셨습니다.
떡을 취하셨고 감사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 이후에 떡을 쪼개셨고 나누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떡은 예수님의 몸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 행동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떡을 취하셨습니다. 떡의 일부가 아니라 떡 전체를 취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몸 전체를 들이셨다는 의미입니다.
구약 성경에 여러 가지 제사가 있는데 그중에 번제가 있습니다.
번제는 재물 전체를 불태워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다른 재산은 재물의 일부만 태웠습니다.

화목제의 경우에 내장과 기름만 불태우고 나머지 고기는 나누어서 먹었습니다.
하지만 번제는 재물 전체를 불태워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헌신과 복종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때 번제로 드리셨습니다.
그분의 몸 전체를 들이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감사하셨습니다.
떡을 취하시고 감사 기도하셨습니다.
다른 구절에서는 축사하셨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재능, 소유, 건강,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행위가 바로 감사 기도입니다.

 하나님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들으시고 감사하기도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분의 몸 전체가 하나님께 속한 것을 인정하는 고백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면서 감사했던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면서 감사했던 적이 있으십니까?
이렇게 헌금할 수 있는 물질을 허락하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했던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저의 젊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러면서 너무나 너무나 기뻤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20대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 소중한 것을 드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떡을 쪼개셨습니다. 

영어로 break 라고 하죠.
떡을 떼셨다라고 할 수도 있고, 떡을 찢으셨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한 덩이었던 떡을 쪼개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움켜쥐며 살아갑니다.
더 많은 돈, 더 많은 재산을 쌓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분의 모든 것을 쪼개시고 찢으셨습니다.
심지어 그분의 몸을 찢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그분의 모든 것을 쏟아주셨습니다.


네 번째로 예수님은 떡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받는 것을 좋아하는데 예수님은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의 육체를 위해서 떡과 포도주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그분의 살과 피를 주셨습니다.
사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죠. 

첫째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이 있고, 둘째는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을 하게 됩니다.
어떤 선택을 내리기 전에 우리는 자동적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이익일까 손해일까 계산합니다.
학교를 선택할 때도 계산합니다. 

회사를 선택할 때도 계산합니다.
심지어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계산합니다. 

누구와 결혼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큰 이득일까 계산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을 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본체이신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가장 귀한 그분의 생명까지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찬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기억하고 기념하는 시간입니다.
주님은 그분의 몸을 취하셨고 감사하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그분의 몸을 찢으셨고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죄와 사망에 빠진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주님은 그분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까지 하셨을까요?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라고 그분의 목숨까지 주실 정도로 사랑하셨을까요?
성경은 예수님의 사랑에 담긴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아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분의 생명을 주신 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그 사랑의 삶을 우리 또한 살아가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기억하는 성찬의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찬식을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예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절반만 맞는 말입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념하는 시간입니다.
동시에 성찬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살아가셨는지를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시간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살아가신 방식을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처럼 죽는 것도 신앙이지만,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도 신앙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처럼 죽는 것보다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미국의 목회자이자 작가인 맥스 루케이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물을 줄 때 우리는 가장 멋있다. 사실 선물을 줄 때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닮았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위해서 선물을 준비했던 적이 있으십니까?
생일이나 결혼,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정성껏 마음을 담아서 선물을 준비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선물을 준비할 때 우리가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물 받을 사람의 유익을 생각합니다.
이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나도 또한 기뻐합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정말로 멋있는 모습입니다.

나의 기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쁨을 구할 때 우리는 제일 멋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닮았습니다.
세상에는 선행을 하고 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뭐 불우 아동을 위해서 재난 당한 이웃들을 위해서 큰 금액을 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할까요? 

신문에 알리고 존경을 받으려고 그렇게 할까요?
물론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변에 알리지 않고 남몰래 선행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마음 가운데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참된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놀라운 기쁨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기쁨을 충만히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평생 나 자신만을 위해서 움켜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열심히 일해서 다른 사람을 구제할 것이 있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일합니다. 

더 많은 것을 갖고 더 좋은 것을 누리기 위해서 일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본을 따라가는 우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어려운 이웃들에게 구제할 것이 있게 하기 위해서 일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선한 일을 위해서 힘쓰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오셨던 박종호 장로님도 암으로 고통받는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열심히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그날 봤던 영상에 나왔던 선교사님 중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분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선한 일 하는 분을 보면요 마음에 감동을 받습니다.
아 나도 이런 선한 일에 동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도와줄 것이 있으려면 평소에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존 웨슬리가 말한 것처럼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저축해서 열심히 나누어 주는 것이 진정한 행복인 줄로 믿습니다.
진정한 제자도는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의 삶을 따라가는 것임을 기억하면서 자신을 내어주는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성찬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시간입니다.
성찬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합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이것은 성찬이 가리키는 과거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찬은 또한 미래의 은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입니다.
본문 26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아멘.

성찬식을 통해서 우리는 과거만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또한 고대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립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그날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좀 연로하신 분의 생신을 축하하는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70세 80세가 되신 분들의 생신을 축하할 때 우리가 그분의 탄생도 축하하지만 건강하게 오래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분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축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오랫동안 섬기신 성도님들이 계십니다.
김창렴 목사님께서 부임하셨을 때를 기억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지금으로부터 53년 전 이야기입니다. 

김창렴 목사님께서 훌륭하게 사역하시고 원로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권성수 목사님께서 부임하셨습니다.
권 목사님께서 훌륭하게 사역하시고 원로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함께하신 성도님들이 계십니다. 

지금은 연세가 많으시고 몸이 많이 약해지셨죠.
제가 그런 어르신들을 뵈면 항상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중에 제가 원로 목사 될 때까지 건강하게 지내시라고 이야기를 드립니다.
동신 교회에서 세 번 연속으로 원로 목사가 나올 때까지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 달라고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면 그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는 동시에 또한 미래도 바라봅니다.
과거의 시간이 지금 나의 정체성을 형성한 것처럼, 지금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미래의 나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성찬은 과거의 은혜만을 기억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성찬은 미래에 임하게 될 약속을 기대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떡과 잔을 대하며 주의 죽으심을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찬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시간입니다. 동시에 우리 현재의 삶을 재물로 드리는 시간입니다.
1세기 기독교 예배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희생 제사가 없었습니다.
다른 모든 종교에는 제사가 있었는데 기독교에는 제사가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께서 단번에 완벽한 희생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흠 없고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의의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줄로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는 제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생 제사를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산 재물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아멘, 하나님은 우리가 산 제물, living sacrifice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려야 하는 영적인 예배입니다.
영적인 예배는 거룩하고 신령한 그런 예배가 아닙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찬양만이 아닙니다.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영적인 예배는 우리의 인생을 예수님과 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에서 예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찬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방식을 기억합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고자 결단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찬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아가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지난 주간에 꿈너머 꿈 프로젝트 대구 지역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 사역을 통해서 후원을 받았던 목사님들과 또 이분들을 섬기는 멘토 목사님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사진에 보는 것처럼 아주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이죠.
대구 경북 지역에서 사역하시는 목사님들인데 다양한 모습입니다.
이 중에는 서울 출신도 있고 대구 출신도 있고, 부산 출신도 있습니다.
각각 담당하는 사역도 다르고 교회의 형편도 다릅니다.
80명 모이는 교회 있고 800명 모이는 교회 있고, 8천 명 모이는 교회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고, 오직 그 은혜로 살아간다는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그 어떤 사명도 감당할 수 없다고 우리는 한 마음으로 고백했습니다.


이찬수 목사님께서 대구 지역 목사님들을 아주 좋아하십니다.
꿈너머 꿈 프로젝트가 전국에서 있었는데 가장 모범적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룬 곳이 바로 대구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을까요?
상황도 다르고 형편도 다른데 어떻게 하면 강력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은혜만 기억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은혜만 자랑하면 됩니다.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혜 안에 거하도록 서로서로 기도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억의 식탁입니다. 

 

기억의 식탁 앞에서 우리 모두는 평등합니다.
교회에 1년을 다녔든 50년을 다녔든 상관없습니다.
헌금을 1만 원 하든 100만 원 하든 상관없습니다.
여러분, 헌금 많이 한다고 떡 두 개 주지 않습니다.

중직자라고 해서 잔 두 개 주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의 떡과 하나의 잔을 받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식탁 앞에서 그 어떠한 차별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힘으로 자기 의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똑같은 성찬을 받으며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기억합니다.
가족을 다른 말로 식구라고 하죠. 

식구의 문자적인 의미는 한 집에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는 영적인 식구입니다.
한 교회에서 함께 예배하면서 함께 성찬을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 기억의 식탁에 모여서 함께 떡과 잔을 나누었습니다.
성찬은 단지 과거를 추억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 주의 죽으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찬은 과거의 은혜와 미래의 은혜가 만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며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gsk1Pd82vfw?list=PLiKnkSvoyvs0oP2CjhJ-FcDz7BymmE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