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부터 새로운 설교 시리즈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1세기 교회 이야기라고 시리즈 제목을 정했습니다.
교회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초대교회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돌아보면서 오늘날 교회가 기억하고 회복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하면서 혹시 교회에 실망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교회 안에 있는 갈등과 부조리, 부도덕을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교회가 세상과 똑같다고 느낄 때 실망하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부자가 특별 대우를 받습니다.
뭐 돈이 있으면 수많은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교회 본당을 공연장이라고 하면 앞 좌석은 비싸겠죠.
뒤로 갈수록 가격이 점점 더 내려가고 2층 좌석은 더 쌀 것입니다.
좋은 자리에 앉으려면 당연히 돈을 더 많이 내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헌금 많이 내는 사람을 위한 지정석 이런 거 없습니다.
누구든지 은혜를 사모하면 예배 시간 일찍 나와서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에서는 권력자가 특별 대우를 받습니다.
뭐 국회의원이나 시장을 보면 머리를 숙이고 잘 보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유력한 후보가 와도 따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 저명한 정치인이 와도 예배 중에 따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교사님이 오시면 소개합니다.
선교지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귀하게 섬기시는 선교사님께서 교회를 방문하시면 예배 중에 소개하고 환영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보다 선교사님을 더 존경하는 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통치하는 곳이 바로 참된 교회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땅의 교회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교회도 사람이 모인 곳이다 보니까 여러 가지 문제와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교회 안팎의 문제를 대할 때마다 사람들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고 말을 합니다.
초대 교회와 달리 현대의 교회는 변질되고 타락했다는 거죠.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초대교회의 어떤 면을 회복해야 할까요?
초대교회에는 건물이 없었고 가정에서 모였으니까 교회의 부동산을 다 팔아야 할까요?
초대교회에는 당회, 재직회 이런 거 없었으니까 교회의 모든 조직과 제도를 다 없애버려야 할까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입니까?
기독교 역사에서 초대교회의 회복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9세기 미국에서 제2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을 때 한 분파가 이러한 주장을 했습니다.
이들은 기존 교회의 제도와 전통을 비판하면서 문자 그대로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성경 복귀 운동, 영어로 Resoration Movement 라고 부릅니다.
상당히 급진적인 신학이었고, 따라서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못했습니다.
기존 교회를 비판하기 위해서 모든 제도와 전통을 부정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는 1세기라는 역사적인 상황에서 존재했습니다.
현대 교회는 21세기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를 역사적 상황에서 분리해서 마치 이상적이고 순수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초대교회도 결코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아나니아, 삽비라 같이 성령을 훼방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시리즈 제목을 초대교회 이야기라고 하지 않고 1세기 교회 이야기라고 정했습니다.
여기에는 최초의 교회를 1세기라는 시대적 상황 안에서 살펴보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초대교회를 너무 이상적으로 낭만적으로 보는 것은 사실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를 그 역사적인 맥락에서 살펴보면서 오늘날 우리 교회가 배워야 할 교훈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작으로서 교회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회를 뜻하는 헬라어는 에클레시아입니다.
이 단어는 밖으로라는 뜻을 가진 에크와 부르다라는 뜻을 가진 칼레오의 합성어입니다.
에클레시아 하면 그 문자적인 의미가 바깥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최초의 교회는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세워졌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발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세워졌습니다.

성경에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셨던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루는 질문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질문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위대한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 함께 읽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오.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아멘,
이 말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완벽한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약속된 메시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제2의 성자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베드로를 좀 만만하게 생각할 때가 있는데 사실 그는 아주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모든 사람 중에서 최초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장 완벽하게 고백한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고백을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1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또 내가 내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려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아멘,
바로 이 구절에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에클레시아는 사도들이 사용했던 단어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처음 사용하신 단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너무 당연한 말이고 너무 상식적인 말이죠.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진리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교회 안에 많은 갈등이 있는데 대부분은 한 가지 이유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교회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교양에 있는 사람들이니까 대놓고 말하지는 않죠.
하지만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우리 교회 제일 오래 다녔으니까 이 교회의 주인입니다.
내가 헌금 제일 많이 했으니까 내가 이 교회의 주인입니다.
나만큼 봉사한 사람 없으니까 내가 주인입니다.
내가 담임 목사니까 주인이고 내가 장로니까 주인입니다.
교회 안에 예수님이 아닌 사람 주인이 있으면 그 교회에는 갈등이 있습니다.
사람 주인이 많을수록 그 교회에는 더 많은 갈등이 있습니다.
여러분, 한 가지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주인 의식을 갖는 것과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은 다른 개념이죠.
주인 의식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섬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교회에 대한 강한 소속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앞장서서 섬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내가 교회를 위해서 이만큼 헌신했으니까 나만큼 하지 않은 사람은 조용히 있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평안한 이유는 주인 행세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를 가장 오랫동안 섬기신 원로 장로님께서 가장 겸손한 마음으로 교회의 덕을 위해서 헌신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를 섬긴 기간과 상관없이 서로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닙니다.
담임 목사도 아니고 당회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교회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정의입니다.
에클레시아는 문자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죠.
누가 우리를 불렀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13절 함께 읽겠습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아멘.
오늘 본문에는 주어가 빠져 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부르심에 응답해서 나아왔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나아왔다'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로 보면 they came to him 입니다.
그들이 주님께로 나아왔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부르심에 응답해서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건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세계 선교라는 목표를 위해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라는 인격에게로 나아왔습니다.
부르심은 매우 인격적인 행위입니다.
기계는 사람을 부를 수 없습니다.
이념이나 사상도 사람을 부를 수 없습니다.
오직 인격만이 사람을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부르면서 강요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는 분명히 소리를 들었는데 응답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못 들은 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기쁜 마음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발적인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부를 때 상대방의 반응을 컨트롤 할 수 없습니다.
그가 반응하도록 조정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반응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르심은 매우 인격적인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존중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로보트처럼 대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의지와 선택을 존중하셨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반응하는 것은 나의 전 인격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 시간의 일부, 내 소유의 일부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존재 전체와 행위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영국의 신학자 오스기니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명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께 부르셨기에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의 행위 전체, 우리의 소유 전체가 특별한 헌신과 역동성으로 그분의 소환에 응답하여 그분을 섬기는 데 투자된다는 진리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부르심을 영어로 calling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소명을 뜻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소명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까?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구나라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 이루어지는 데 사용받는 것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 성도님들 개인적으로 만날 때 자주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동안 동신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언제 가장 큰 보람을 느끼셨나요? 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성도님들마다 다 예전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동신 세계 선교회를 설립해서 처음으로 선교사님 파송했던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권성수 목사님께서 부임하시고 교회가 폭발적으로 부응했던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비전관을 건축하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헌신했던 이야기도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리더십 전환이 아름답게 된 이야기도 해 주십니다.
신앙생활하면서 기쁨과 보람을 누리시는 분을 보면 저도 정말 너무나 행복합니다.
아 이 사명을 감당하라고 나를 부르셨구나라고 확신하는 분을 보면 얼마나 마음이 기쁜지 모릅니다.
우리는 아무 이유 없이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 목적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인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부르심을 귀하게 여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성경에서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신약 성경에 기록되기 이전에 이미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도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물론 그 의미는 성경의 의미와 조금 달랐습니다.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에클레시아는 한 도시의 정치적인 이익,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공동체였습니다.
그 도시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에클레시아를 결성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테네 에클레시아 하면 아테네 시민들이 자신의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서 결성한 공동체였습니다.
에베소 에클레시아 하면 에베소 시민들이 자신의 지역사회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결성한 공동체였습니다.
성경에서도 에클레시아가 이런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에 대해서 그 지역 민회에서 결정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에클레시아는 교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정치적인 이익을 구하는 공동체, 즉 민회를 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뜻하신 에클레시아는 이와 다른 의미였습니다.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는 자격을 갖춘 시민만 참여할 수 있었지만, 성경의 에클레시아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는 그 지역의 정치적인 이익을 구했지만, 성경에 에클레시아는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분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리스 로마의 에클레시아는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 공동체라면 성경의 에클레시아는 공동의 예배를 드리는 예배 공동체였습니다.
성경의 교회는 예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예배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를 누가 세웠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 열두명을 택하시고 세우셨던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마가복음 3장 14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여기에서 세우다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poieo 입니다.
이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는 만들다, make 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라 할 때 poieo 가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세상을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교회를 예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성경에서 창조는 주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에 이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만드셨기 때문에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전 세계 모든 교회를 통치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그러므로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주인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기뻐하는 시간, 그 시간이 바로 예배의 시간입니다.
이 예배를 통해서 교회는 하나가 됩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모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습니다.
다양한 배경, 다양한 지위, 다양한 학벌을 가진 사람들이 모입니다.
우리의 겉모습은 다 다르지만 교회 안에서 아주 특별한 유대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교회의 주인 대신 예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공동의 이익, 공동의 프로젝트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공동의 예배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우리 모두는 동일하신 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하는 줄로 믿습니다.
작년 선교 주일에 '교회는 당신의 생각보다 큽니다'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이 말은 세계 기도 정보를 쓴 패트릭 존스턴이 쓴 책 제목이기도 한데요.
교회는 시간 면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큽니다.
교회는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셨고, 이 땅이 사라진 이후에도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크기 면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한국에만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도 교회가 있고, 아프리카에도 교회가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교회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큽니다.
교회는 조직 면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큽니다.
전통적인 교단과 지역 교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형태의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합니다.
자발적인 선교회와 단체들을 통해서 세계 복음화가 놀랍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로잔 대회와 같은 국제 선교대회에 가면 예수님의 교회가 얼마나 큰지 우리가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 하면 흔히 눈에 보이는 우리 교회만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 교회는 동신교회이겠죠.
하지만 예수님의 교회는 사실 전 세계적인 교회입니다.
전 세계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전혀 다른 인종, 전혀 다른 언어,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계 교회에는 다양한 형식과 제도, 전통이 존재합니다.
우리 교회와 같이 장로 제도를 따르는 교회도 있고, 하지만 감독 제도를 따르는 교회, 회중 제도를 따르는 교회가 있습니다.
선교의 방법을 놓고 보면 훨씬 더 다양한 것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문자가 없는 민족에게 구슬로 성경을 전파하는 단체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억압받고 학대당하는 어린이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단체가 있습니다.
창조 세계를 돌보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단체가 있습니다.
여러분, 전 세계 교회가 얼마나 크고 다양한지 모릅니다.
이렇게 다양한 형식과 전통, 다양한 사역을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전 세계에 있는 모든 크리스천들이 동의할 수 있는 제도와 교리가 과연 존재할까요?
전 세계 교회는 예배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인종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릅니다.
배경도 다르고 지위도 다르고 학벌도 다릅니다.
사회에서 만났으면은 정말 말 한마디 섞을 일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경우죠.
그런데 그런 사람과 함께 한 교회에서 주님을 예배합니다.
동일한 찬송을 부르고 동일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과 어떤 관계가 되는지 아십니까?
그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형제 자매가 됩니다.
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에클레시아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가족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50절 함께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니라 하시더라.
아멘.
가족은 운명 공동체입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으로도 가족의 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가족이 된 것은 동일한 분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 누구도 줄 수 없는 강력한 유대감을 줍니다.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사람을 형제 자매로 부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리스 로마의 에클레시아는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공동 이 공동체였지만,
성경에 에클레시아는 공동의 예배를 추구하는 예배, 공동체인 것을 기억하며 진정한 예배 안에서 하나 됨을 경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10명도 아니고 20명도 아니고 12명의 제자를 부르신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파가 몇 개가 있었죠?
12지파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12 지파는 옛 언약의 공동체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축복하기 위해서 그분의 백성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새 언약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으로 온 세상을 축복하기 위해서 그분의 백성으로 교회를 택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완성하고 확장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교회를 새로운 이스라엘, 뉴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옛 언약의 공동체는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후손이었습니다.
하지만 새 언약의 공동체는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7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런 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아멘,
우리는 한국 사람이지요.
혈통적으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 안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었던 그 하나님을 우리도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우리에게도 유효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의 통로로 부르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복과 은혜를 흘려보내는 축복의 통로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우리를 예수님께서 축복의 통로, 복음의 채널로 부르셨습니다.
깨어진 이 세상을 바로잡고 회복하는 일을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개인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개개인으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혼자서 예배드리고, 혼자서 은혜 받고, 혼자서 전도하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에클레시아는 예수님의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이란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부르심에 대한 놀라운 사실을 한 가지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 13절 말씀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아멘,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나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원하는 자들, 주님의 뜻에 따라 필요한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고 분명한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세계 최고의 감독은 아무나 영입하지 않습니다.
최고의 팀을 만들기 위해서 꼭 필요한 선수를 영입합니다.
축구 팬들 사이에서 오랜 논쟁의 주제가 있죠.
손흥민이 훌륭한가, 박지성이 훌륭한가 하는 논쟁입니다.
두 선수 모두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최고의 활약을 했습니다.
개인적인 능력에서는 손흥민 선수가 더 탁월할 수 있습니다.
스피드도 빠르고 슈팅도 잘합니다.
동양인 중에서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이 다시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박지성 선수는 세계 최고의 팀에서 활약했습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최고의 팀에서 여러 번 우승을 했습니다.
세계적인 명장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 선수를 매우 높게 평가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감독은 일반인과 보는 눈이 다르겠죠.
최고의 팀을 만들기 위해서 꼭 필요한 선수를 영입합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팀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선수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습니다.
그래서 퍼거슨 감독이 엄청난 공을 들여서 당시 네덜란드에 있던 박지성 선수를 영입했습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최고의 팀을 만들기 위해서 그가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교회를 위해서 꼭 필요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원하는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고 성경에 나온 말입니다.
13절에 '예수님께서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인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좌우에 계신 분들께 이렇게 인사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원하십니다' 라고 인사하겠습니다.
여러분, 옆에 계신 분들 그냥 일반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인재들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원하신다는 생각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반대의 경우는 많이 생각하죠.
내가 예수님을 원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원하는 마음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원하시는 마음이 더 큰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이유는 여러분이 예수님을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의 의지로 교회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해서 교회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교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뿐입니다.
먼저 우리를 부르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우리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를 겸허하게 합니다.
동시에 우리에게 큰 감격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가 뭐라고 주님께서 원하실까요?
우리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주님께서 우리를 찾으셨을까요?
이 사실은 교회 안에 있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또한 변화시킵니다.
우리 교회에 있는 모든 분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내가 거절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내가 싫어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우리의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과거에 어떤 학자는 초기 기독교가 빈민들의 운동이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치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시고 위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당시 사회의 최고위층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를 통해서 많은 귀부인들과 고위 관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안에는 가난한 자들도 있었고 고위 관료들도 있었습니다.
노예 신분으로 살아가는 자들도 있었고 그들의 주인들도 있었습니다.
학식이 없는 자들도 있었고 학식이 높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사회적 지위, 배경, 학식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마땅한 모습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특정 계층이 주류를 이루는 교회는 성경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엘리트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도 성경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수성구에 있다고 해서 특정 계층이 주류를 이루는 것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모자이크와 같습니다.
모자이크 조각 하나하나는 불완전한 모습입니다.
여러분, 모자이크 조각 하나가 멋진 경우가 없지요.
하지만 불완전한 모자의 그 조각이 모여서 멋진 작품을 이루어 갑니다.
하나의 조각이 해낼 수 없는 엄청난 아름다운 모습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은 예수님께서 원하신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영원한 뜻과 목적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세계 최고의 감독이 영입한 선수를 비전문가가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온 우주의 주인이 부르신 사람을 우리가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골로새서 3장 1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레파나 무할레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니라.
아멘,
오직 예수님은 전부이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전부인 곳입니다.
교회는 예수님만 자랑하는 곳입니다.
그리스 로마의 에클레시아는 특정 도시와 시민을 위한 이익 공동체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클리시아는 전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예배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다양한 장벽을 넘어서 하나가 되는 가족 공동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의 모든 공동체와 다릅니다.
교회는 공동의 이익, 공동의 프로젝트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공동의 예배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교회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그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님만 예배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8iSnrt2MK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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