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29
성경은 세상 전체에 대한 거대한 이야기, 메타 네러티브(Metanarrative) 입니다.
그 이야기는 창조와 타락과 구속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의 그 네러티브는 현실에 공존하고 있는 선과 악, 기쁨과 고통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세계관입니다.
인간은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타락한 존재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는 그런 안타까운 존재입니다.
창조의 선함과 타락의 악함을 모두 다 설명할 수 있는 세계관이 바로 기독교 세계관입니다.
하지만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세계관에 대항하는 여러 가지 종류의 세계관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하나님을 부정하는 인간 중심의 세계관이기 때문에 이것을 인본주의 세계관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3주에 걸쳐서 인본주의 세계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은 모더니즘 사상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변화와 혁신이 있었습니다.
과학 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방식의 대규모 경제 활동이 가능해졌습니다.
이전에는 사람이 일일이 다 손으로 물건을 만들었는데 이제는 공장에서 기계로 대규모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훨씬 더 많은 제품을 훨씬 더 저렴한 가격에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계몽주의와 시민 혁명으로 새로운 형태의 정치 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더 이상 왕을 섬기지 않고 국민이 주권을 갖는 민주주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국민의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고 그 임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권력의 남용을 방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변화와 발전은 1914년까지 이어졌습니다.
1914년까지 유럽을 지배하던 세계관을 '모더니즘'이라고 부릅니다.
이 모더니즘의 핵심 가치가 있는데 바로 '진보'입니다.
영국의 사회학자 앤드류 워커는 당시 유럽의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관점에서 볼 때, 진보가 세상의 대세인 듯했고, 과학은 복된 유토피아의 비밀을 열 수 있는 열쇠였다' 라고 말했습니다.
눈부신 경제 성장과 정치 발전을 이룬 사람들은 핑크빛 전망을 가졌습니다.
드디어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이 땅에 유토피아를 세울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스스로 유토피아를 세우려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그중에 가장 첫 번째 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신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바벨탑 사건은 노아 자손의 족보 중간에 등장합니다.
노아에게는 세 명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샘, 함, 야벳이 있었는데 이 중에 샘이 중요합니다.
그 샘의 후손 중에서 아브라함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0장에서 노아 자손의 족보를 열거하다가 11장의 바벨탑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다시 샘의 족보로 돌아가서 12장에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11장과 12장은 의도적으로 대비되어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과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성경에서 가장 대비되는 사건입니다.
창세기 11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절 2절 함께 읽겠습니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온 땅의 언어와 말이 하나였다고 합니다.
초기 인류 역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에 거류했다 거기에 정착했다고 말씀합니다.
현대인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 아 그냥 동쪽으로 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를 유심히 읽은 고대 사람의 눈으로 보면 이 구절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낄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동쪽으로 간다는 말은 무언가 불길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을 피해서, 하나님을 떠나서 어디로 도망간 사람들이 대부분 동쪽으로 갔습니다.
창세기 4장 16절에 보면 가인이 여호와를 떠나서 에덴 동쪽으로 갔고요.
13장에 보니까 롯이 이제 아브라함과 헤어져서 동쪽으로 옮겼습니다.
창세기 29장에서 야곱이 형 에서를 떠나서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신기한 일입니다.
가인이 살인죄를 저지르고 동쪽으로 도망갔습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서 동쪽으로 가서 소돔으로 갔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서 도망가면서 동쪽으로 갔습니다.
창세기에서 동쪽으로 가는 건 하나님을 피해서 하나님을 떠나서 가는 것을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근거로 해서 동쪽으로 가는 것 자체를 죄라고 주장하면 이것은 지나치게 성경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창세기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어 보입니다.
본문에 보니까 사람들이 동쪽으로 옮겨 다니다가 시날의 평지에 정착했습니다.
시날 평지는 어디일까요?
다니엘 1장 2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주께서 유다 왕 여호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심에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여기 나오는 그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에서 빼앗은 성전 기물을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놓았다라고 말씀합니다.
바벨론 왕이 유다에서 빼앗은 보물을 자기 신들을 위한 신전에 두었는데 그것이 시날 땅에 있었습니다.
그러면 시날 땅은 어디에 있을까요? 바벨론에 있을 것입니다.
바벨론은 고대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 중에 하나였습니다.
런던에 있는 대형 박물관에 가면 뭐 지금도 고대 바벨론 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지금 보아도 아주 멋지고 웅장한 모습입니다.
고대 문명의 찬란한 모습이 바벨론 유물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노아의 자손들이 그 바벨론 지역에 정착한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문 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노아의 자손들이 바벨론에 정착해서 성읍과 탑을 건설하고자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곳에 정착해서 안정된 생활을 하기 원합니다.
뭐 그런 의미에서 크게 잘못된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맨 마지막에 나온 말, '온 지면의 흩어짐을 면하자'라는 말이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그냥 이곳에 모여서 편안하게 안전하게 살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입니다.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9장 1절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아멘.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아들들을 괴롭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 28절에 나오는 것과 똑같은 말씀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대리인으로 온 땅에 가서 그곳을 다스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지역에 정착한 노아의 후손들은 이 명령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우리는 온 땅으로 흩어지기 싫고 그냥 여기에 모여서 편안하게 살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타락한 존재인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번영과 유익을 위해서 온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서 흩어지지 않고 그냥 이곳에 머물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성읍과 탑을 건설해서 우리의 힘으로 낙원을 건설하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인간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세우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 사상의 핵심입니다.
인본주의 사상은 역사가 이렇게 오래되었습니다.
창세기 11장에서부터 그 역사적인 뿌리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인본주의 사상에 꽃을 피운 것이 바로 계몽주의 철학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테는 '인간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 바로 계몽이다'라고 말했습니다.그는 사람의 이성을 순수 이성과 실천 이성으로 구별했는데 기본적으로 인간의 능력과 본질을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칸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라는 종 전체가 지향하는 목적지는 계속되는 진보이며, 이것을 이루고자 우리는 목표에 시선을 집중한다.
이 목표는 순전히 이상이긴 하지만 실제로 최고의 가치가 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는 이성의 시대이고 그들은 이성의 능력을 100% 신뢰했습니다.
과거 중세 시대에는 왕과 교회의 권력에 눌려 있었지만 이제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서 인간의 이성으로 진정한 유토피아를 세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더니즘 사상의 핵심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서 세상을 바라보기만 하는 그런 구경꾼이 아니십니다.
하나님 인류 역사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것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벨론에 모인 사람들이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탑을 건설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하늘에 닿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야만 했습니다.
본문 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아멘.
이 말씀은 인간 사회에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간섭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오지 않으시면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높은 탑을 건설해도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구조화하면 역 교차 구조가 됩니다.
가운데를 중심으로 해서 양쪽이 역으로 교차를 이루고 있습니다.
가운데를 중심으로 전반부는 인간의 노력을 나타내고 있고, 후반부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여호와께서 내려오셨더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의 중심에는 여호와께서 내려오셨다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놀라운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그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작동하는 시계를 만드시고, 시계가 스스로 작동하게 하셨다라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연 법칙에 따라서 이 세계가 운행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관점을 가리켜 이신론이라고 부릅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것도 성경적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칙을 인정하니까 이것도 옳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간섭과 개입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완벽한 세상을 만드셨다고 인정하지만, 자연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기계론적인 세계관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우주는 폐쇄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개입도 불가능하고 인간의 개입도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도 이 우주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인간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우주는 하나님께서 초기에 세팅한 그 자연 법칙대로만 움직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을 통해 관찰할 수 있는 자연 법칙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신론, 이성을 신봉하는 관점이라고 우리가 부릅니다.
이신론에 가장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와 타락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주는 존재하는 그대로 선하고 하나님의 법칙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을 잘 활용해서 자연 법칙과 영적인 법칙을 발견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 입장을 따라갑니다.
유신진화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도 이 관점을 따라갑니다.
물론 유신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 중에서 독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도 아마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의 이성을 최우선 가치로 여깁니다.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 중에서 일반 계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연과학과 성경 중에서 자연과학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성경에 있는 내용 중에서 자연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신론을 따르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권의 책을 주셨다. 하나는 성경이고 또 하나는 자연이다' 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문장은 절반만 맞고 절반은 틀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권의 책을 주신 것은 맞습니다.
성경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을 통해서는 절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자연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것까지만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없으면 우리는 우주의 기원과 인생의 의미를 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자연을 관찰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자연을 연구해도 구원의 방법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폐쇄적인 우주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주는 하나님의 역사와 간섭에 열려 있습니다.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다니엘 2장 21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패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
아멘.
어떤 나라가 일어나고 또 어떤 나라가 쇠퇴하는 것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세계 역사와 기독교 역사를 함께 놓고 보면 인류 역사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나라가 강해지는 것과 그 나라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것 사이에는 매우 강력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18세기에 영국이 부상한 것과 영국이 선교를 주도한 것 사이에 연관성이 있습니다.
20세기에 미국이 부상한 것과 미국이 선교를 주도하는 것 사이에 연관성이 있습니다.
21세기에 하나님께서 한국을 높이시는 것과 한국이 선교의 중요한 공헌을 하는 것 사이에 연관성이 있습니다.
만약에 이것이 딱 한 번 일어난 일이라면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것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면 절대로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역사를 운행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역사는 흘러가고 싶은 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따라서 흘러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역사의 의미에 대해서 연구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희 딸이 친구와 이런 게임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친구랑 한 문장씩 번갈아가면서 이야기를 쓰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인물과 배경을 딱 정해놓고 스토리의 전기를 쓰는데 자기가 한 문장, 친구가 한 문장 쓰는 거예요.
그러면 이야기의 전개가 어떻게 될까요?
엉망진창이 될 것입니다.
딱 내가 생각하는 이야기 방향이 있는데 친구가 그다음 문장을 엉뚱하게 쓰겠죠 그럼 나는 다시 원래 의도로 가져오고 싶지만 친구가 그다음 문장을 또 엉뚱하게 씁니다.
여러분, 이렇게 되면 일관된 이야기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지구상에 인간이 이렇게 많은데 만일 우리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를 쓴다면 엉망진창이 될 것입니다.
일관된 이야기 일관된 역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은 역사의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작위로 무질서하게 살아갔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인류의 역사를 보면 일관된 의미와 방향이 있습니다.
그런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 것이 아닌데 지나고 보면 놀라운 역사적인 방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나라가 발전하는 데 있어서 경제 발전이 먼저일까요? 민주주의가 먼저일까요?
우리나라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경제 발전이 먼저입니다.
이게 먹고 사는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지 그다음에 민주주의를 우리가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책에서 배우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사로 있으면서 현장에서 배웠습니다.
당장에 먹을 것이 없는데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일단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지 그다음에 민주주의를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루면 제일 좋겠지만 현실 세계에서 그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먼저 한 가지를 하고 나서 그다음에 다음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에는 분명한 순서가 있고 방향이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한 사람은 한 가지 일을 하고 내려옵니다.
그 사람이 전체의 청사진을 가지고 계획을 세우고 그러지 않습니다.
나는 내 인생을 살고 내 일을 하고 내려옵니다.
그러면 그 다음 사람이 올라가서 내가 했던 일을 이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커다란 어떤 역사적인 이야기가 완성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역사의 의미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그 역사를 주도하는 초월적인 인격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역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인격체가 커다란 역사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역대상 29장 12절 함께 읽겠습니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제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아멘.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역사의 의미입니다.
역사는 우연의 연속이 아닙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줄로 믿습니다.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은 다 이해할 수 없더라도 하나님은 그분의 뜻대로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시간이 오래 지나고 나면 그제서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게 될 뿐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온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반박해서 흩어짐을 면하고자 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본문 7절 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제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아멘.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온 지면에 흩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원래 뜻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전과 뜻은 언제나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느냐 그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의 선한 도구인지 악한 도구인지 하는 그 차이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사용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악한 도구로 사용됩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고, 우리는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11장에서 바벨탑을 세워서 스스로 이름을 내려고 했던 그들의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다음 장인 창세기 12장에 가면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의 이름을 위대하게 하겠다'라고 약속하십니다.
창세기 12장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내게 복을 주어 내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아멘.
바벨탑을 세운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름을 위대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의 이름을 위대하게 하겠다라고 약속하십니다.
이름이 위대해지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높아지려고 해도 스스로 높아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름이 위대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창세기 11장과 12장은 엄청난 대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자기 이름을 위대하게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하나님께서 내가 너의 이름을 위대하게 하겠다라고 약속하신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삶을 사시겠습니까?
내 힘으로 스스로 위대해지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을 높여주시는 것을 경험하시겠습니까?
나의 힘으로 위대해질 수 없음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주님의 손이 여러분을 높여주시는 것을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벨탑 사건에 개입하셔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서로 소통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온 지면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본문 마지막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아멘.
바벨이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신들의 문이었습니다.
바벨론 지역에는 지구라트라는 불리는 신전 탑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계단으로 된 높은 건물을 세우고 그 꼭대기에 제사를 드리는 신전을 세웠습니다.
26:09
여러분 바벨탑 사건은 고대 신화가 아닙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지구라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이라크 지역에 남아 있는 디그라트가 몇 개 있습니다.
계단을 따라서 올라가서 그 꼭대기에 가면은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신전이 있습니다.
이 지그라트의 높이가 약 45미터 정도 됩니다.
요즘 아파트 높이로 약 15층의 높이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15층이면 높은 건물인데 4천 년 전에 15층 건물이면 얼마나 높았을까요?
저희가 부룬디에 있을 때 제 아내는 국제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뭐 말이 국제학교지 학생의 90% 이상이 아프리카 아이들이었습니다.
제 아내는 이제 미국에서 가져온 교재를 가지고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어느 단원의 주제가 고층 빌딩이었습니다.
그 교과서에 고층 빌딩이 가득한 도시를 묘사하는 글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부룬디에는 5층이 넘는 건물이 없습니다.
태어나서 5층이 넘는 건물을 본 적이 없는 아이들에게 고층 빌딩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합니다.
나중에 뭐 비행기 타고 유럽이나 미국에 가야지 그 책에서 말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4천 년 전에 15층의 높이의 건물을 세울 수 있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이 기술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그 지역을 신들의 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교만한 인간이 자신의 기술로 신들의 문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그들의 계획을 꺾으셨습니다.
높은 탑을 쌓아서 우리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라고 말하는 자들의 계획을 꺾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언어를 혼란스럽게 하셔서 서로 의사소통할 수 없게끔 만드셨습니다.
옆에 사람이 뭐라고 뭐라고 말을 하는데 바랄 바랄바랄 소리로만 들리는 것입니다.
우리 영어 표현 중에 블라블라라는 표현이 있죠.
시끄러운 상황에서 뭐라고 얘기하는데 이해할 수 없을 때 블라블라블라 한다라고 영어로 표현합니다.
마찬가지로 바랄바랄 하면은 시끄럽게 뭐라고 얘기하는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히브리어로 바랄 하면 혼잡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지역의 이름이 혼잡한 곳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신들의 문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혼잡한 곳이 된 것입니다.
이와 동일한 현상이 현대 사회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술의 발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기술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뭐 어느 정도는 타당한 면이 있기도 합니다.
지금은 과거보다 훨씬 더 편리한 시대가 맞기 때문이죠.
식기세척기가 없던 시대보다 지금이 훨씬 더 편리합니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대보다 지금이 훨씬 더 편리합니다.
예전에는 내비게이션 없이 어떻게 운전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기술이 발전한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할까요?
여러분은 20년 전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십니까?
더 편리해진 것은 맞지만 더 행복하다고 선뜻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분명히 기술이 발전하고 더 편리해졌는데 왜 더 행복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까요?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윤리가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를 윤리가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기술은 발전했는데 윤리는 퇴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술은 발전했는데 윤리가 퇴보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것은 마치 악인에게 기술이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라는 질문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러분, 악인에게 기술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으로 더 나쁜 일을 많이 할 것입니다.
더 큰 기술로 더 큰 죄를 저질러서 더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끼칠 것입니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윤리가 따라가지 못하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억압하고 착취하는 데에만 악용할 뿐입니다.
지금은 4차 산업혁명 시대입니다.
지금까지 네 차례 산업 혁명이 있었습니다.
산업혁명이 있을 때마다 기술적으로 놀라운 발전과 혁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더 행복해졌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산업혁명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 수반되는 수많은 사회적 윤리적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1차 산업혁명 때 영국에는 많은 공장들이 생겨났습니다.
면직물 산업이 발전해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습니다.
그 결과 영국은 전 세계에 면직물을 수출해서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심각한 사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중에 가장 큰 문제가 아이들의 노동 문제였습니다.
방직기에 연결한 실이 끊어지면 그 방직기 밑으로 들어가서 실을 연결하는 그 일을 체구가 작은 아이들이 주로 했습니다.
그런데 공장이 많아지면서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들도 더 많아졌습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들은 교육의 기회를 상실하고 하루에 12시간 이상 일했습니다.
여러분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일해 보십시오.
나중에는 눈이 침침해지고 멍해집니다.
당시 영국 아이들이 이러한 학대를 받았습니다.
공장 내부의 여건도 좋지 않아서 공장에 다니는 아이들을 가리켜 백인 노예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1차 산업혁명의 결과로 수많은 아이들이 학대를 받았습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 중에 하나가 바로 드론입니다.
무인 조종이 가능한 드론을 통해서 우리가 예전에 할 수 없었던 수많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땅이 넓은 미국에서는 드론을 이용해서 배송 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
월마트나 아마존에서는 드론을 이용해서 식료품과 의약품을 배송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드론을 활용해서 농업과 임업에서 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드론이 사용되는 가장 중요한 분야가 바로 군 수업입니다.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데 드론이 엄청나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드론 공격으로 사망했는지 모릅니다.
드론은 4차 산업혁명에 선도하는 그 기술 중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윤리의 발전이 기술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할 때, 그 놀라운 기술을 가지고 우리는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과학 기술만으로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사회 윤리와 도덕이 회복되지 않으면 우리는 최첨단 기술로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일을 할 뿐입니다.
18세기와 19세기를 지배했던 모더니즘 사상은 인류의 진보를 믿었습니다.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이 땅에 유토피아를 세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4천 년 전에 바벨탑 사건에서 시작되었던 인간의 교만이었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바벨론은 교만과 우상, 숭배를 상징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바벨론은 하나님의 뜻을 대적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세우고자 했던 그 모든 헛된 노력을 상징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던 그 바벨론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8장 21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아멘.
인간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세울 수 없습니다.
기술의 발전을 윤리가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새로운 기술로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공격하는 일만 할 뿐입니다.
역사의 주권자 대신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선한 도구가 될 줄로 믿습니다.
온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기억하며 주님 앞에 겸손하게 행함으로 주님께 쓰임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M1bBArp1h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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