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원목사 설교

2025년 6월 22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5. 6. 23. 10:53

 

세계관 이야기 (5) 영광의 소망을 선포하라
골로새서 1:24-29 | 문대원 목사
2025-06-22


성경은 종교 의식과 율법에 관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세상 전체에 대한 거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 거대한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전체 이야기는 창조와 타락과 구속으로 이어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그분의 형상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은 하나님을 배신했고 하나님께 반역했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기보다 스스로 왕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내가 법을 만들어서 내 마음대로 내 정욕대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인간의 반역으로 탈락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공의가 회복되었고 하나님과 인간은 다시 화평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이 구원은 개인을 넘어서 국가와 사회를 넘어서 더 나아가 창조 세계 전체까지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지난주에는 이 회복의 의미와 범위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이 구속의 확장과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그분께서 완성하신 이 구원이 온 세상으로 확장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는데 그 범위는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아멘.

십자가의 피로 이른 화평이 모든 만물에게 전달되기를 주님께서 원하십니다.
땅에 있는 것들, 하늘에 있는 것들이라는 표현을 우리가 히브리어로 '메리즘'이라고 합니다.
양쪽 끝에 있는 것을 말함으로써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땅에 있는 것들, 하늘에 있는 것들이라는 표현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구원이 세상 모든 만물에게 전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속의 범위입니다. 

그러면 이 일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구속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온 우주의 통치자로서 영광을 받으신 주님께서 그분의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그다음에 성령이 임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시고 그 결과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시작부터 성령의 공동체였습니다.
성령의 공동체인 교회는 하나님께 아주 중요한 책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세상 가운데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이었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만물을 화평케 하는 그 복음을 전파하는 책임을 받았습니다.
로잔 언약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목적의 중심에 서 있으며, 복음을 전파할 목적으로 하나님이 지정하신 수단이다.
십자가를 전하는 교회는 스스로 십자가의 흔적을 지녀야 한다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교회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는 목적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범위는 우리 지역사회가 아니라 전 세계 전 우주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방법은 힘과 돈과 권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사상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내가 사는 지역을 넘어서는 전 세계적인 공동체, 전 우주적인 공동체를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힘과 권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흔적을 통해서 이 공동체를 세운다는 생각 자체는 인간이 절대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사람이 세운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께서 세우신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실행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하나님의 마스터 플랜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성령께서 이 땅 가운데 오셔서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온 땅에 복음이 증거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어 갑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스터 플랜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적 교회의 본질입니다.
교회는 교회 자체의 유익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머리의 지시를 따라서 움직이게 됩니다.
교회 역시 머리 되신 예수님의 지시를 따라서 예수님의 뜻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23장 10절 11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아멘.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랍비, 선생이라는 칭함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지도자, 우리의 선생은 오직 한 분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폼나는 자리에 올라가서 영광을 받고 칭찬 듣는 것을 즐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 되신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섬기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보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신 모습입니다.
최후의 만찬을 앞두고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자신의 지위나 권리를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그러한 섬김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뜻은 우리의 육체가 원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거룩하고 우리의 육체는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타락한 본성을 따라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여러분 혹시 '브로콜리 테스트'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어떤 사람이 배고프다고 할 때 이게 진짜 배고픈 건지 아닌지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배고프다고 하는 사람에게 브로콜리를 주는 것입니다.
진짜 배고픈 사람은 브로콜리도 맛있게 먹습니다.
하지만 진짜로 배고프지 않은 사람은 브로콜리 말고 맛있는 거 달라고 말할 것입니다.
나중에 한번 해 보십시오. 

진짜 배고픈 건지 아닌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몸에 좋은 브로콜리는 맛이 없습니다. 

하지만 몸에 나쁜 라면이나 치킨은 맛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은 건강에 나쁠까요?
저는 여기에도 타락의 영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입맛까지 타락해서 건강한 음식은 맛이 없고, 건강하지 않은 음식이 맛있게 느끼는 것입니다.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난입니다. 

어떤 종류의 고난일까요?
우리의 육체가 원하는 것을 거스르는 고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7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아멘.

사도 바울 같은 위인도 내 몸을 쳐서 복종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육체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고 그것을 거슬러야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공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70세가 되면 '종심소욕불유구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다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라는 말입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경지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해도 하나도 죄가 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70세 이상의 어르신들께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하나도 죄가 되지 않습니까?
만약에 이 말이 사실이라면 70세가 넘으면 절대로 부부싸움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자동적으로 사랑하고 배려하는 것이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70세가 넘으신 분들이 부부 싸움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 제가 질문하지 않겠습니다.
괜히 곤란한 질문해서 어렵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나이가 들면 죄를 덜 지을 것 같은데,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 작은 일에 서운함을 느낀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에 따르기 위해서는 내 몸을 쳐서 복종해야 합니다.

육체의 본성을 따르면 하고 싶지 않지만, 이것이 거룩한 뜻이고 하나님 나라의 유익한 길이기 때문에 육체를 거스르는 고난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입니다. 

머리가 되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내 몸이 편하고 안락한 것을 목표로 하고 살아간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2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아멘.

여기에 나오는 괴로움은 새로운 생명을 낳는 출산의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의미 없는 고통이 아니지요. 

신학적으로 말해서 이 괴로움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고통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 새로운 시대의 중심에 바로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자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새로운 언약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공동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과 구원을 나타내기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이방의 빛으로 삼아서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을 그들의 민족주의적 이상 안에 가두었습니다.
크고 광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특정 민족, 특정 문화, 혈통 안에 가두려고 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열방의 소망 대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새로운 언약 공동체를 세우셨습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것을 완수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바울은 성경이 증거하는 그 거대한 이야기 안에서 교회의 위치를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만물을 회복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통로로서 교회의 역할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 23절 함께 읽겠습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에 충만함이니라 

 

아멘.

하나님께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기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세상 모든 만물을 회복시키기 원하십니다.
이 일을 누구에게 맡기셨습니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게 맡기셨습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완수하지 못했던 책임을 이제는 교회에게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세상 가운데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세계 많은 민족이 구원의 아름다움을 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8장 20절 21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다시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주민이 올 것이라 이 성읍 주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하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스가라 선지자는 말세에 일어날 일을 예언했습니다.
많은 민족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나와서 그분의 은혜를 구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보고 자발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그분의 언약 공동체를 통해서 아름답게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선교학자 네이비 버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은 본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매력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외부인들을 끌어당겨서 공동체에 참여하도록 그들을 초청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들의 모범적인 존재는 외부인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자석이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은 매력적이어야 합니다.
매력적이라는 말은 뭐 화려하고 고급스럽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시대에 널리 퍼져 있는 우상 숭배에 오염되지 않으면서도 진실한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의 우상이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모든 것을 돈의 가치로 환산합니다.
이렇게 물질적인 시대에 재정적으로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진실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우리는 매력을 느낍니다.
제가 아는 분은 주차장에서 최근에 접촉 사고를 당했습니다.
가만히 있는데 다른 차가 와서 충돌을 했습니다. 

이렇게 사고를 처리할 때 가장 비싸게 처리하는 방법이 있고 가장 저렴하게 처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수리 기간 동안 렌트비를 청구할 때 가장 많이 받는 방법이 있고 가장 적게 받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받을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많이 받으십니까?
아니면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서 가능하면 적게 적당하게 받으려고 하십니까?

이 시대의 우상을 따라가는 사람은 최대한 많이 받으려고 하겠지만 그리스도는 이는 이와 정반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우상에 오염되지 않으면서 진실된 사랑을 실천할 때에 세상 사람들은 무언가 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드라마, 한국 애니메이션이 미국에서 인기 있는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미국 드라마는 매우 폭력적이고 매우 선정적인 데 비해서 많은 한국 드라마는 조용하고 잔잔한 감동이 있다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동시대 문화의 트렌드를 따라갈 때에 거기에 반대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가므로 우리가 믿는 신앙이 얼마나 아름답고 매력적인지 보여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시면요. 

비밀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비밀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중요한 비밀을 바울이 발견한 것일까요?
본문 2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 비밀은 만세 만세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바울이 말하는 비밀은 오랫동안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입니다.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구원의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마침내 밝히 드러났습니다.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비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27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아멘.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비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두 개의 다른 시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이 시대는 죄와 사망이 다스리는 시대입니다.
둘째로 다가올 시대는 생명과 성령이 다스리는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두 시대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아멘.

예수님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구분하셨습니다.
영어로 하면 this age와 the age to come 입니다. 

이 세대는 아담이 범한 최초의 죄로 시작하였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반역했을 때 죄와 사망이 다스리는 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죽음에는 육체적 죽음, 영적인 죽음, 영원한 죽음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절망입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다가올 시대는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되었습니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을 때 생명과 성령이 다스리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이 구원을 믿는 사람은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서 생명과 성령의 통치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이 시대일까요?
아니면 다가올 시대일까요? 

2025년 현재는 죄와 사망이 다스리는 시대입니까?
아니면 생명과 성령이 다스리는 시대입니까? 다음 도표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이 시대와 다가올 시대가 겹쳐 있는 중간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다가올 시대가 시작되었지만 아직 구원의 최종 완성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세상에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중간기에는 사망의 권세도 작동하고 있고, 동시에 성령의 권세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가장 완벽하게 설명하는 방법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기쁠 때도 있지만 고통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100% 기쁜 인생은 없습니다. 

100% 고통스러운 인생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고통과 기쁨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예수 향남 교회를 담임하는 정갑신 목사님이라고 계십니다.
복음과 도시 모임에 가면 자주 뵙는 분인데 아주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분이십니다.
젊은 목회자들에게 큰 존경을 받는 분이라서 제가 내년도 신년 기폭 강사로 초청했습니다.
정갑신 목사님께서 이 땅에서의 시간이 얼마나 특별한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은 사랑과 고통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천국에 가면 영원히 사랑만을 느낄 것이고, 지옥에 가면 영원히 고통만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멋진 말이지 않습니까?

천국에 가면 우리가 사랑만을 느낄 것이고, 지옥에 가면 고통만을 느낄 것입니다.
오직 이 땅에서만 사랑과 고통을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죄가 없다면 우리는 고통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땅에 구원이 없었다면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고통과 사랑을 모두 다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이곳에 죄도 있지만 구원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와 다음 시대, 다가올 시대가 겹쳐져 있는 중간 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지금은 D-Day와 V-Day의 중간과 같습니다.

스위스 신학자 오스카 쿨마는 그리스도와 시간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 보면 2차 대전의 운명을 결정한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착륙했습니다.
상륙했습니다. 연합군이 이 날을 D-Day 라고 불렀습니다.
Decide Day, 결정적인 날이라는 뜻이죠.
이 작전에 성공함으로써 2차 대전의 흐름이 바뀌었고 승리를 위한 결정적인 조건이 완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전투가 끝난 날은 1945년 5월 8일이었습니다.
나치 독일이 공식적으로 항복한 날이 이날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날을 V-Day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D-day와 V-day 사이에는 약 1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승리를 위한 결정적인 조건은 다 완수되었지만 마지막 승리를 위해서 계속해서 전투를 해야만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D-day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결정적인 조건은 이날 다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과 최후 심판이 바로 V-day입니다.
모든 전투가 끝나고 사탄이 최종적으로 항복하게 될 날입니다.
D-day와 V-day 사이에는 마지막 승리를 위한 영적인 전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승패는 이미 다 결정되었습니다. 

우리의 노력에 승패가 달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승패는 결정되었습니다.

승리를 위한 모든 결정적인 조건은 완수되었지만 마지막 승리를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전투를 이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어떤 분은 왜 교회에서 전쟁 이야기 그런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에 불편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에 나온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6장과 골로새서 2장에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와 사탄을 따르는 자 사이에 전쟁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전쟁은 물리적인 싸움은 아닙니다. 

몸으로 치고 받고 하는 그런 싸움 아니고 이 전쟁은 영적인 싸움이고 세계관의 싸움입니다.
지난 금요일 기도회 때 말씀드린 것처럼 성문 앞에서 원수와 담판을 짓는 것입니다.
누구의 생각이 옳은지, 누구의 가치관이 옳은지 서로 논쟁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확고한 성경적인 세계관이 필요합니다.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주에 중립 지대란 없다. 한 치의 공간, 단 1초의 시간까지도 하나님이 권리를 주장하시고 사탄은 그 주장에 맞선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 새로운 시대는 생명과 성령이 다스리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죄와 사망의 시대가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중간 길을 살아가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이 승리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헌신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복음의 신실한 증인이 되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과 소망을 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작년에 사도행전 설교를 하면서 사도행전의 열린 결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역사가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결론을 내리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여줍니다.
이것은 마치 영화의 열린 결말과도 같습니다. 

이야기를 종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의도적인 장치입니다.
사도행전의 열린 결말은 관객을 무대로 초청하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다 들은 관객들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복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소극적인 방관자로 살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복음의 이야기에 동참하시겠습니까? 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서 각 사람을 권하고 가르치고 세우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8절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아멘.

각 사람이라는 표현이 세 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각 사람을 권하고 각 사람을 가르치고, 각 사람을 완전한 자로 세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권한다라는 것은 경고한다 충고한다라는 뜻입니다.
가르친다라는 것은 체계적으로 훈련한다는 뜻이고요.
완전한 사람으로 세운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로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모든 것은 교육과 훈련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가 자랑하는 교육과 훈련입니다. 

예수님을 전파하기 위해선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누가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합니까? 

중직들만 받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각 사람 모든 사람이 받아야 합니다.
전도와 선교, 교육과 훈련은 둘로 나뉘어진 것이 아닙니다.
전도와 제자 훈련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난 4차 로잔 대회의 핵심 의제 중에 하나였습니다.
아프리카 남미에 있는 비서구권 교회에 공통적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전도는 열심히 하고 있는데 제자 훈련을 잘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회가 양적으로는 성장을 하는데 질적으로는 연약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4차 로잔 대회의 공식 문서인 서울 선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제자는 복음으로 삶이 변화된 사람이다. 이러한 변화는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나 좋은 토양에 심긴 씨앗처럼 그 복음이 단번에 완전한 변화를 가져오거나 단번에 변화의 열매를 맺지는 않는다' 라고 고백합니다.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복음이 단번에 완전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훈련되고 변화되는 과정은 아주 긴 프로세스입니다.
생각의 틀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불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기도에 힘을 써야 합니다.
생명 사역의 진수를 경험하시려면 여러분 훈련을 받으셔야 하고, 금요 기폭에 나오셔야 합니다.
주일 예배만 드리는 것은 우리 교회 생명 사역의 한 3분의 1 정도만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의 틀이 변화되고 성령의 불을 체험할 때 우리가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가 되어서 생명 사역과 세계 선교를 능력 있게 감당할 줄로 믿습니다.

 

90년대 대학생 성교 운동 사이에서는 치열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고지론과 미답지론 사이의 논쟁이었습니다.


한 부류는 크리스천이 사회 지도층으로 올라가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다른 부류는 크리스천이 사회에 취약 계층으로 가서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둘 중에 뭐가 맞을까요? 라고 질문하면 둘 다 맞다고 대답하시면 됩니다.
크리스천이 사회 지도층으로도 가야 하고, 사회 취약 계층으로도 가야 합니다.
왜 이런 것을 가지고 싸우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사회 지도층으로 갈 수도 없고, 모든 사람이 사회 취약 계층으로 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부르신 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다만 어디로 가든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제가 세계 여러 나라에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예를 보았습니다.
고지론을 외치면서 사회 지도층으로 가는 사람들도 보았고, 미답지론을 외치면서 사회 취약계층으로 가는 사람도 모았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다 좋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어디로 가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지도층으로 간다고 해놓고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취약 계층으로 간다고 해놓고선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어디로 가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지 아니면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아가는지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저는 거창한 비전을 말하는 사람에게 잘 감동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단 하나라도 좋으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 당한 흔적이 있는지 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흔적이 보인다면 저는 그 사람의 말을 주의 깊게 듣습니다.
하지만 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면 아무리 화려한 말을 해도 잘 듣지 않습니다.

 

말로는 누구든지 헌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말에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십자가의 흔적에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7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아멘.

율법이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선교가 어떻고 말로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는 이 고백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진정한 간증은 예수 믿어서 잘 되고 복받고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간증은 내 몸 안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여신 그 예수님의 본을 따라서 우리 안에 십자가의 흔적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고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이 기쁜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에서 억눌린 자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 안에 있는 이 영광의 소망을 선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vaCuGYWhvK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