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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5일 대구동신교회

마이코 2026. 7. 13. 13:12


오늘은 맥주 감사 주일입니다. 

올 상반기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감사는 만족과 평안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감사하지 않는 이유는 만족이 없고 평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만족이 있으십니까? 

평안이 있으십니까?
내 인생이 행복하지 않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나 자신을 탓하게 된다면 아마 절망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나의 부족함, 나의 무능함을 바라보며 절망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탓하게 되면 분노하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은 다른 사람의 책임이라고 떠넘기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난한 것은 부자들이 나에게 돌아올 불을 가져갔기 때문이라고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매사에 다른 사람을 탓하게 되면 마음에 화가 많습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않아서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사회는 분노 사회입니다. 

사소한 일에도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아파트 층간 소음으로 다투다가 살인까지 저지르는 경우가 더 이상 놀랍지 않을 정도입니다.
물론 살다 보면 분노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운전을 괴팍하게 하는 사람을 만나면 화가 납니다.
깜빡이를 켜지 않고 갑자기 내 앞에 끼어드는 차를 보면 화가 납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 화를 내봤자 나만 손해입니다.
상대방은 내가 화가 난지도 모르고 내 기분만 나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운전을 괴팍하게 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화장실이 급한가 보다라고 생각합니다.
빨리 화장실 가야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저렇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굳이 모르는 사람에게 화를 낼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가 분노를 건강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는 극심한 경쟁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경제적인 불평등 불공정의 문제도 있습니다. 내 마음을 솔직하게 나눌 수 있는 유대 관계도 약화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떻게 분노를 다루어야 할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미국의 상담가 마샤 캐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정의하고 그런 현실을 쉽게 바꾸거나 견디거나 무시할 수 없을 때 분노하게 된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분노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분노는 무언가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 바꿀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반응입니다.
제가 이번에 미국에 입국할 때 입국 심사대에서 잡혔습니다.
그동안 제가 미국에 수십 번도 넘게 가봤는데 처음으로 이 문제가 발생했죠.
제 여권을 딱 보더니 아 과거에 유학생 비자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이십년 전에 제가 유학했으니까 당연히 기록이 있겠죠.
무언가 확인할 것이 있다고 옆방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옆방으로 갔는데 30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딱 그 순간 제가 생각했습니다. 

한 시간은 걸리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주일 사역을 마치고 주일 저녁 비행기로 이제 이동을 했습니다.
14시간 비행기를 타고 가서 현지 시간으로 밤 11시에 도착했습니다.
지칠 대로 지쳐 있는데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1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여러분이 이 상황이라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당연히 화가 나겠죠. 

왜 애꿎은 사람을 붙잡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비행기 안에서 오늘 설교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분노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제가 분노할 상황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설교 예화로 사용하라고 하는 것처럼 분노할 만한 상황을 마주했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제가 화내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대신에 내가 이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찾기로 했습니다.
뭐라도 좋으니까 딱 한 가지라도 이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을 찾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 경험을 통해서 한국의 행정 시스템이 얼마나 좋은지 깨달았습니다.
미국 공무원들은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었습니다.
밤 11시에 30명이 대기하고 있는데 천천히 일처리를 했습니다.
우리나라였으면 10분이면 할 일을 한 시간 동안이나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행정 시스템이 얼마나 훌륭한지 감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제가 마음의 분노를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분노에 대해서 중요한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분노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 중에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기쁨과 슬픔, 불안과 공포를 느낍니다.
슬픔을 느끼는 것, 불안을 느끼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죄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마찬가지로 분노를 느끼는 것도 죄는 아닙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공격을 받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오히려 불의 앞에서 분노를 느끼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학대당하고 고통당하는 사람을 보고서 분노를 느끼지 않으면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분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다만 분노가 통제되지 않을 때 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마음의 분노를 품고 있을 때 우리는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분노하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해가 지도록 분노를 품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 함께 읽겠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분노를 느끼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다만 해가 지도록 오랫동안 분노를 품고 있으면 안 됩니다.
분노의 감정을 품고 있으면 우리의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화가 나서 말 실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그때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흥분하게 되면 우리의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신학자 에바 그레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분노는 영혼의 눈을 어둡게 하고 기도하는 상태를 망가뜨린다' 라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분노에 휩싸이게 되면 우리의 영혼의 눈이 어둡게 됩니다.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고 영성을 지키는 것도 어렵게 됩니다.
마음의 분노가 가득한데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가 기도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분노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는 모세였습니다.
여러분, 모세는 구약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어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끊임없이 불평했습니다. 

물이 없다고 불평하고 음식이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채소가 먹고 싶다고 불평했고, 고기를 먹고 싶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들의 불평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것은 가난한 정탐을 한 이후였습니다.
10명의 정탐꾼이 보고했지요.

가나안 땅의 거미는 크고 강성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온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게 하려고 여기까지 인도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14장 27절 함께 읽겠습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아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부르십니까?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이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악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반복해서 불평하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않는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가난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가난한 전쟁을 수행할 만한 믿음도 없었고 용기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 사건이 있었던 것이 민수기 14장이었습니다.
민수기 14장은 광야에서 있었던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암울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출애굽 1세대 전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오늘 본문 민수기 20장에 이르렀습니다.
가데스바네아 광야에서 물이 없으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또 불평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문 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이르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아멘.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다투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모세에게 도전하고 반항했습니다.
리더에게 도전하고 반항하는 것은 그를 리더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었을 때 그때 우리도 죽었으면 좋았겠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민수기 16장에 나오는 고라 자손의 반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라 자손이 모세의 권위에 대항하여 반역했다가 땅이 갈라져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하고 거역한 자들을 징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차라리 우리도 그때 죽었으면 좋았을 거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반역했다가 심판받은 자처럼 우리도 차라리 그때 죽었으면 좋았겠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모세였다면 어떻게 느꼈겠습니까? 

여러분의 리더십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떻게 느꼈을까요?
정말로 힘이 빠졌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하고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느꼈을 절망감과 무기력함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만약에 그 상황이었다면 저도 힘이 빠지고 화가 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원망하고 불평해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반석에게 명령해서 물을 내라 하면 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모세가 이스라엘 회중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문 10절과 11절 우리 빨간색 글씨만 읽겠습니다.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하나님은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쳤습니다.
모세는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백성들을 향해서 그의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끊임없이 불평하는 자들을 향해서 그의 마음을 표출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모세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유명 연예인이 했던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렸을 때 아주 가난하게 자라서 한 번도 해외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공한 이후에 부모님을 모시고 처음으로 유럽을 갔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그 부모님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기쁘고 대견한 일입니까?
우리 아이가 성공해서 유럽으로 모시고 왔으니까 기쁜 일이잖아요.
그런데 그 어머니는 여행하는 내내 불평했다고 합니다.
무엇을 불평하는지 아십니까? 

김치가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아 지금이야 뭐 케이푸드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이지만 20년 전에는 유럽에 김치가 없었겠죠.
그런데 우리가 김치 먹으려고 유럽 간 게 아니잖아요.
그곳 문화를 보고 그곳 음식을 즐기기 위해서 왔습니다.
자기 돈으로 간 것도 아니고 자녀가 모시고 간 것이면 기쁜 마음으로 가면 됩니다.
그런데 그 부모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경우에 그 자녀가 화를 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돈을 내고 시간을 내서 부모님을 위해서 여행을 준비했는데 음식 가지고 불평하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날 것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모세의 분노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화낸 것이 아닙니다. 

착한 사람들을 향해서 죄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 화낸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모세의 분노에는 뼈 아픈 결과가 따라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12절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거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드리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아멘. 여러분은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번 분노했다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이것은 오랜 논쟁의 주제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모세의 분노를 심각하게 여기셨을까요?
어떻게 한 번 분노했다고 해서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하셨을까요?
이것은 단지 분노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12절 보니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한 거로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한 번 분노했다고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모세한테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모세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우리 중 어느 누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특정한 영역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어떤 영역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오늘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다른 구절을 보면 힌트가 나와 있습니다.
시편 106편 33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의 뜻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아멘.

시편 106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그중에 33절은 오늘 본문 므리바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고 그로 말미암아 모세가 망령되게 말하였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세가 누구를 향해서 망령되이 말했을까요?
하나님을 향해서 망령되게 말했을까요? 

아니면 이스라엘을 향해서 망령되게 말했을까요?
아마도 이스라엘을 향해서 망령되이 말했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불평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을 향해서 망령되게 말했을 것입니다.
야~ 너희는 도무지 소망이 없다. 

야~ 너희 같은 믿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라고 아마 말했을 것입니다.
홧김에 모세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불평과 거역을 보면서 기분이 나빠서 한 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말을 심각하게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을 인도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분노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망령되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망령되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행동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결과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분노가 이 정도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홧김에 하는 말, 홧김에 하는 행동이 이렇게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20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아멘.

분노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성품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모세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불평하는 사람들, 거역하는 사람들을 보며 분노를 쏟아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 망령되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심각한 죄로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야 하는 리더가 분노에 휩싸여서 하나님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라고 말했습니다.
반석에서 물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모세는 분노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리더로서 심각한 결격 사유가 되었습니다.

 

모세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분노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분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대상이 누구인지 간에 분노의 감정에 휩싸이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못하게 됩니다.
제가 예전에 이런 말씀드린 적 있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연결되어 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 분노하는 것과 하나님께 분노하는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향한 분노가 하나님을 향한 분노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수직적인 관계와 수평적인 관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노 자체가 죄라고 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노하기를 속히 하게 되면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14장 17절 함께 읽겠습니다.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

 

성급하게 화를 내는 사람은 어리석은 일을 행하게 됩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게 되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의로운 분노라 하더라도 여러분 그것이 방치되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무엇보다 분노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과 소망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분노라는 악감정만 남아서 부정적인 말과 부정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이 느끼는 분노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그 교회의 모습과 현재 한국 교회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죠.
그런데 그 분노를 제대로 다스리지 않고 방치하면 어리석은 일을 행하게 됩니다.
작년에 통일 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있었습니다.
정통 교회라고 볼 수 없는 그들의 실상이 드러난 시간이었습니다.
한 공중파 TV에서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통일교와 정통 교회가 어떻게 다른지 논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사회자가 한 신학자에게 질문했습니다.
정통교회에서 통일교를 이단이라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이것은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통일 교회 교리와 신앙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저에게 이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는 통일교는 문선명이라는 사람을 신으로 믿는 미신이라고 설명하겠습니다.
북한에서 김일성 일가를 신격화하는 것과 통일교회에서 문석명 일가를 신격화하는 것이 같은 이치라고 설명하면 통일 교회 문제를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신학자가 어떻게 답하는지 아십니까? 

통일 교회의 교리와 신앙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를 비판했습니다.
일부 교회의 비리와 문제를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그 토론회는 한국 교회를 비판하는 토론회가 아니라 통일교를 비판하는 토론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신학자는 왜 통일교가 아니라 한국 교회를 비판했을까요?
한국 교회를 향한 분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아무리 신학 박사면 뭐 합니까?
아무리 지식이 많으면 뭐 합니까?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서 어리석은 말을 하고 있는 그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분노가 우리를 다스릴 때 우리는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분노는 마음의 기쁨과 소망을 빼앗아 갈 뿐 아니라 이성적인 판단 능력도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게 됩니다.
아무리 그것이 정당한 분노라고 해도 그것이 신속한 분노로 하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분노를 다스리지 못할 때 우리의 이성과 판단 능력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며 마음을 다스리고 분노를 다스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도 분노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와 타락을 바라보시며 하나님은 분노하십니다.
하나님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분노하셨습니다.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분노하셨습니다.
마음속으로만 분노를 느끼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 분노를 표출하셨습니다.
장사꾼들의 상을 뒤엎으시고 채찍으로 그들을 내쫓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합니다.
예수님도 화를 내셨으니까 나도 화를 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분노와 인간의 분노는 완전히 그 성격이 다릅니다.
시편 7편 11절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오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아멘.

하나님의 분노는 공의로운 분노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인적인 이유로 분노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가득한 죄악에 대해서 분노하십니다.
그분의 공의와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 분노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해서 분노하십니다.
그분의 백성을 해치는 죄악에 대해서 분노하십니다.
이방인들의 압제와 사탄의 정죄에 대해서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의 분노와 사람의 분노는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분노합니다.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에 대해서 분노합니다.

팀켈러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자아, 우리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분노한다. 우리가 분노하는 이유를 진지하게 살펴보면 금방 당황하고 부끄러울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화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 내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가? 

솔직하게 돌아본다면 당황스럽고 부끄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시당했다고 느끼면 화를 냅니다. 

실제로 무시당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느끼기만 해도 화를 냅니다. 

또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화를 냅니다.
어떤 물건을 사려고 줄을 섰는데 딱 내 앞에서 다 팔렸습니다.
그럼 화가 나잖아요. 

우리가 바라는 욕구가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 우리는 화를 냅니다.
내 기대와 욕구가 좌절되었을 때 우리는 분노를 표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유익, 우리의 자존심 때문에 화를 냅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가 돌아보면 부끄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을 향한 사랑으로 분노하십니다.
그의 백성들을 해치고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죄악에 대해서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사랑의 동기에서 나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순수한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우리의 분노와 다른 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십니다. 

 

성경에 제일 처음 나오는 하나님의 성품이 있습니다.
모세가 신의 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성품이 선포되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6절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아멘.

여러분 이 구절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처음 나오는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십니다.
노하기를 더디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너무나도 중요한 성품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분노를 볼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노하기를 더디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신데, 그런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는 것은 아주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저희 딸에게 가끔 질문할 때가 있습니다. 

딸이 어렸을 때에는 엄마가 좋은지 아빠가 좋은지 물어봤습니다.
지금은 조금 컸으니까 다른 곳을 물어봅니다. 

엄마가 무서운지, 아빠가 무서운지 물어봅니다.
그럼 저희 딸이 어떻게 대답하는지 아십니까?

아빠가 화낼 때 더 무섭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물어보니까 이렇게 답했습니다. 

'아빠는 화를 잘 안 내는데 그런 아빠가 화를 낸다는 것은 정말 화가 났다는 뜻이기 때문에 더 무섭다' 고 이야기합니다.
예리한 분석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제 아내가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아닙니다.
평소에 화를 안 내는 사람이 화를 내면 더 무섭다는 거죠.
무언가 큰 일이 생겼으니까 그 사람이 화를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화를 내신다면 정말로 큰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가장 사랑하시는 우리를 위해서 분노하십니다.
우리의 유익과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회복을 위해서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공의롭고 더딥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괴적이지 않고 사람을 회복합니다.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그 목적을 완수하게 됩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모습으로 분노해야 합니다. 

나의 유익, 나의 자존심, 나의 명예를 위해서 분노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잘못된 목적의 분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올바른 목적이라 하더라도 빨리 분노하면 안 됩니다.
노하기를 속히 하게 되면 그 분노의 감정에 휩쓸려서 어리석은 일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16장 32절 함께 읽겠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낮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아멘.

분노는 내가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지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자기 자신, 자기 명예를 사랑하는 자는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분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 분노하게 됩니다.
올바른 목적이라 하더라도 노하기를 속히 하면 안 될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고 노하기를 더디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는 이 회복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서 성령의 열매인 오래 참음과 온유와 절제로 행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HHckw3188v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