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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시간과 시간 너머

마이코 2024. 8. 8. 15:13

 

책을 읽을 때 절대 '건너뛰면' 안 된다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분별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쓸모없는 부분이 나올 거침없이 건너뜁니다.

장에서 제가 하려는 이야기는 어떤 독자들에게는 도움이 되겠지만,

어떤 독자들에게는 쓸데없이 복잡하게만 들릴 것입니.

후자에 속하는 독자는 장에 개의치 말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시기를 권합니다.

 

지난 장에서 기도라는 주제를 잠깐 언급했는데,

여러분이나 제가 내용을 잊기 전에 흔히 기도의 개념과 관련해서 어려워하는 부분을 다루었으면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제게 어려움을 이렇게 표현하더군요.

"하나님을 믿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하나님이 어떻게 수백만 명의 기도를 동시에 듣느냐 하는 점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먼저 주목해야 점은 동시에라는 말에 함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하나님께는 시간이 무한히 많으니만큼,

아무리 기도하는 사람이 많아도 사람씩 차례대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들으실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문제는, 하나님이 어떻게 수많은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시느냐 하는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는 삶이 순간씩 다가옵니다.

한 순간이 지나가야 다음 순간이 다가올 수 있으며, 각 순간은 아주 짧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입니다.

물론 여러분이나 저는 이러한 시간의 연속 -과거, 현재, 미래의 진행- 이야말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삶의 당연한 방식일 아니라 모든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리고 우주와 하나님 또한 우리처럼 언제나 과거에서 미래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려 듭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시간 속에 살지 않는 존재들도 있다는 개념을 처음 소개한 이들은 신학자들이었습니다.

후에 철학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였고, 지금은 과학자들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간에 매여 살지 않으신다는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삶은 연속되는 순간 들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10 30분에 100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기도한다 ,

하나님은 우리가 '10 30'이라고 부르는 짧은 순간에 모든 기도를 들으실 필요가 습니다.

하나님께 10 30-그리고 태초 이래의 모든 순간- 언제나 '현재'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는 불길에 휩싸여 추락하는 비행기 속에서 조종사가 드리는 찰나의 기도를 들으실 여유가 영원 무궁히 있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라는 것을 압니다.

들어맞는 예는 아니지만 비슷한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고 합시다.

저는 "메리는 책을 내려놓았다. 순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장을 쓰려고 합니다.

이때 소설 속에 설정된 가상의 시간 속에 사는 메리의 경우,

책을 내려놓는 일과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 사이에는 시간 간격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메리의 창조자인 저는 가상의 시간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문장을 먼저 놓고 번째 문장을 쓰기 시간 동안 메리에 대해 계속 생각 할 있습니다.

저는 마치 메리가 소설 속의 유일한 등장인물인 얼마든지 메리만 생각할 수 있지만, 제가 그렇게 보낸 시간은 메리의 시간(소설 속의 시간)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

 

물론 이것은 완벽한 예가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사실로 믿고 있는 바를 어렴풋하게나마 보여 수는 있습니다.

작가가 소설 가상의 시간에 쫓기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주의 시간 흐름에 쫓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 사람을 돌보실 여유가 무한히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뭉뚱그려 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여러분 사람 사람 이 그가 만든 유일한 존재인 , 각각의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여러분 하나하나가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간인 ,

각각의 사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제가 예가 하나님의 경우에 맞지 않는 부분은 이런 것입니다.

작가가 하나의 시간 흐름 (소설의 시간 흐름)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시간 흐름  (현실 속의 시간 흐름)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믿는바 하나님은 어떤 시간 흐름에도 매여 있지 않으십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는 지금이 아직 1920년이면서 벌써 1960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삶은 하나님 신입니다.

시간을 우리가 곧장 따라가야 하는 직선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직선이 그려진 종이 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직선의 일부를 한 걸음씩 밟아갑니다.

우리는 A를 지나야 B에 갈 수 있으며 B를 지나야 C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에서, 밖에서, 또는 사방에서 직선 전체를 품고 계시며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개념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가지 표면상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만큼, 애써 이해할 가치가 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기독교를 반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나 계시며 우주를 운행하시는 영원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기였을 때나 자고 있을 우주는 어떻게 계속 운행될 있었단 말인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동시에 '내게 손을 자가 누구냐?' 제자들에게 묻는 인간이 있단 말인가?"라고 반박했지요.

 

결국 함정은 시간과 관련된 속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아챘을 것입니다.

"아기였을 때……",

"어떻게 동시에……?"

다시 말해서 저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역시 시간 속에 있으며 팔레스타인에서 인간 예수로 살았던 기간은 시간의 일부였다고 -나의 군복무 기간 이 생애의 일부를 차지하듯이- 가정했던 것입니다.

아마 우리 대부분이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되기 전의 기간을 거쳐 마침내 인간이 되어 살다가 후에 그처럼 인간으로 살았던 과거를 회상하며 사는 하나님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십중팔구 사실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그리스도의 삶과 모든 시공간을 뛰어넘는 하나님으로서의 삶을 시간 관계 속에 끼워맞출 수는 없습니다.

연약함과 잠과 무지라는 인간적 경험과 본성이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의 신적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시간을 초월한 진리라고 해야 것입니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 안에 있는 인간의 삶이 세상 역사의 특정한 기간(AD. 1년 부터 십자가 처형 때까지) 동안 이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의 실존 역사에서도 기간을 차지하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역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완전한 실재이시므로 역사가 있을 없습니다.

역사가 있다는 것은 자기 실재의 일부는 잃었고(이미 과거 속으로 사라졌으므로) 일부는 얻지 못했다는(아직 미래에 있으므 로) ,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현재라는 찰나뿐인데 현재조차 '지금은 현재'라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그런 존재로 생각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사실은 시간에 매여 사는 우리조차 늘상 그런 존재로 언급되는 일은 피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간 속에 매여 있다고 믿을 등장하는 어려움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은 우리가 내일 일을 알고 계신다'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말 내가 내일 행동을 알고 계신다면,

나에게는 그와 다르게 행동할 자유가 없는 것 아닙니까?

이것 역시 하나님을 우리처럼 시간 흐름에 매여 사는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즉 하나님은 앞일을 미리 안다는 점에서만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어려움입니다.

 

, 그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정말 하나님이 우리의 행동을 예견하신다면,

우리에게 행동의 자유가 있다고 보기는 대단히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시간의 흐름 , 위에 계신 분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그는 우리가 '내일'이라고 부르는 날도 '오늘'처럼 보실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모든 날이 '지금'입니다.

그는 여러분이 어제 일을 기억하시는 것이 니라 지금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는 어제가 이미 지나가 버렸지만 하나님께는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신이 내일 일을 예견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는 내일이 아직 오지 않았지만 하나님께는 이미 왔기 때문입니다.

지금 순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아신다고 해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당신이 내일 행동을 아시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내일에 계시면 서 당신을 지켜보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이 행동하기 전까지는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신다고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행동을 하는 순간, 하나님 께는 이미 '지금' 됩니다.

 

제게는 개념이 상당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는 도움이 된다면, 그냥 잊어버리십시오.

이것은 위대하고 현명한 그리스도인들이 계속 견지해 개념으로서 기독 교와 충돌하는 면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기독교적인 개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나 기독교 신조에 들어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러니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고, 아니 문제 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https://youtu.be/op0vMOQAv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