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15일 대구동신교회

2025-06-15
세계관에 관한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세계관은 세상의 기원과 목적에 대한 아주 거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거대한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세상 전체에 대한 큰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창조와 타락과 구속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신 이 세상은 인간의 죄로 타락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죄는 단순한 실수가 아닙니다.
죄는 의도적인 반역이고 배신입니다.
인간의 죄는 창조 세계 전체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세상은 그 본래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죄의 저주로 인해서 허무함에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죄로 인해서 타락한 자연이 이 정도로 아름다운데 타락하지 않았던 그 원래의 자연은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창조 세계 전체와의 관계 역시 단절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하나님을 대신할 그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애처로운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작정은 인간이 타락한 직후에 나옵니다.
창세기 3장 15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내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내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오,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원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뜻하고, 뱀의 후손은 사탄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회복하고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신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신학자들은 창세기 3장 15절을 원 복음, 원시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그 인류 구원의 계획이 가장 처음으로 선포되는 순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계획을 망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회복하고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요한계시록 22장까지 이어져 갑니다.
인간의 죄는 성경 책3페이지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은 그 이후로 1751페이지에 걸쳐서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죄에 대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책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집요한 사랑입니다.
인간은 실패하고 또 실패해도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셨습니다.
C.S 루이스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그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였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위해서 희생할 때 그것이 가치가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이것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가치 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뛰어넘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간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서 죄와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멘.
혹시 여러분 중에서 아담의 죄가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질문하실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표하는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의 순종 여부에 따라서 그 결과가 인류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약속입니다.
아담은 모든 인간의 첫 번째 대표였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이 대표성의 원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출전합니다.
한국 대표가 일본 대표를 이기면 우리는 한국이 일본을 이겼다고 말을 합니다.
한국 사람 전체가 이긴 것은 아니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가 이겼으면 한국이 이겼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은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죄와 사망이 인류 전체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닮아가는 것처럼 아담의 후손은 아담을 닮아가게 되었습니다.
불순종과 이기심이라는 측면에서 모든 사람은 아담을 닮았습니다.
인간이 타락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것이 다 죄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말하면 그것이 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달에 부부 관계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제가 남편분들에게 부탁을 드렸죠.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는 순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집에 와서 편하다고 아무 말이나 하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죠.
아무 말이나 그냥 생각나는 대로 하면 가족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잔소리를 합니다.
현관에 어질러 있는 신발을 보면서 집안 꼴이 이게 뭐냐라고 짜증을 냅니다.
이렇게 집에 오자마자 잔소리를 하면 가족들이 어떻게 느낄까요?
이 모습을 30년간 지켜본 가족들이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퇴근 시간에 현관문이 열린 즉시 각자 방으로 들어갑니다.
아버지의 그 짜증과 잔소리를 듣기 싫으니까 피하는 것입니다.
집에 와서 편하다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함부로 말하면 가족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간은 타락한 본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행하면 모두가 다 죄가 되고 상처가 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그의 책 팡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인간은 천사와 같아지려다가 오히려 짐승과 같아진다' 라고 말했습니다.
인간과 동물은 전혀 다른 존재이지요.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지만 동물에게는 양심이 없습니다.
동물은 다른 동물을 죽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서 새롭게 우두머리가 된 수사자가 다른 사자가 낳은 그 새끼들을 다 물어서 죽인다고 합니다.
자기를 통해서 낳은 그 새끼들만 남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다른 사자의 새끼들을 죽이면서도 이 수사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죽이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도덕 의식과 양심이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가장 흉악한 범죄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인간성을 잃고 짐승과 같이 되기도 합니다.
짐승이 짐승을 죽이는 것처럼 인간도 인간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해코지한 사람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 사람을 죽일 때가 있습니다.
더 심하게 몰래 들어놓은 보험금을 타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형상이 완전히 깨어진 모습입니다.
짐승과도 같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죄로 인해서 완전히 깨어지고 타락했습니다.
이렇게 깨어진 세상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으로 오셨습니다.
본래 인간이 나타내야 했던 그 하나님의 형상을 완벽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아멘.
누구도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본 적이 없죠.
은혜롭고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난폭하고 엄한 심판자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을 나타내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 함께 읽겠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멘.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 오신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이단 중에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로시온은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을 분리해서 모았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맞는 것 같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은 가난한 민족을 심판하고 블레셋 민족을 심판하는 무서운 분이십니다.
하지만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사랑하시고 과부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을 아주 피상적으로 읽은 것입니다.
눈에 띄는 몇 가지 사건만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성품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이 많으신 것처럼 하나님도 사랑이 많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는 것처럼 예수님도 죄를 미워하십니다.
구약과 신약은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구약은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고, 신약은 메시아가 오셨다고 선포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님은 다른 분이 아니십니다.
두 분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모든 만물이 예수님을 통해서 창조되었다 말씀합니다.
본문 1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아멘.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하여 창조되었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그를 위하여라는 헬라어를 직역하면 '그를 향하여'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은 예수님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께서 모든 만물의 존재 목적이 되신다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도 자기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향하여 존재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찾기를 원합니다.
그 목적을 찾지 못하면 허무함을 느낍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잘 되고 성공해도 인생을 돌아보면 허무할 때가 있죠.
제가 90세 되신 어르신께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살고자 노력했는데 막상 나이가 드니까 내가 인생을 잘 살았나 돌아보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일평생 하나님을 위해 살아오신 분도 이렇게 느낀다면,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온 사람은 이보다 훨씬 더 허망함을 느낄 것입니다.
모든 만물은 예수님을 향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예수님 없는 인생은 허무할 뿐입니다.
내가 평생 추구하였던 돈, 명예, 성공은 죽음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돈이 죽음 앞에서 얼마나 의미 없는지 제가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가 세상을 떠난 지 5년이 되었습니다.
불과 5년밖에 안 지났는데 방송에서 그분을 언급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분이 살아 있을 때에는 그렇게 사람들이 부러워했거든요.
돈 많다고 하지만 세상을 떠나니까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허무합니다.
하지만 존재의 목적이 되시는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만물은 예수님으로 말미암고 예수님을 향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그분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우리 인생의 영원한 목적을 가지게 되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를 쓴 사도 바울은 2천년 전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5년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잊어버렸는데, 2천년 전 사람이 쓴 책을 지금도 읽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사람이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선포했기 때문에 2천 년이 지나도 그것이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존재의 목적 되시는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발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즉각적으로 심판하시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하셨던 말씀에 따르면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는 즉시 죽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들의 심판을 유예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가죽 옷을 만들어서 입혀주셨습니다.
창세기 3장 21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멘.
고대 사회에서 옷은 신분과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집을 나갔던 그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가장 좋은 옷을 입혀주었습니다.
여기에는 아들로서의 신분과 정체성을 회복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입혀주신 것도 동일한 의미가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범죄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서 그 정체성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죄로 인한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한 그들을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 보면 이 구약 성경에는 여러 가지 제사가 나옵니다.
번제가 나오고 속죄제, 속건제 등 다양한 제사가 나오는데 그 핵심은 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그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동물 제사를 드림으로써 그 죄의 허물을 잠시 덮은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하신 메시아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재물의 피는 그 허물을 잠시 덮을 뿐이지만, 십자가의 피는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아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한 인간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화에 대해서 낭만주의적인 그런 관점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유명한 팝송 imagine라는 노래 아시죠?
거기 나오는 가사처럼 종교도 없고 국가도 없고 다툼이 없는 것이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 세계에서 동떨어진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갈등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평화는 공의가 회복된 것입니다.
이사야 32장 17절에 보니까 공의의 열매가 화평이다. 평화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끝난 상태가 아닙니다.
지금 남한과 북한이 전쟁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휴전 협정이 이루어진 지 72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 완전한 평화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전쟁의 위험이 남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공의가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일으켰던 북한이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의가 세워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진정한 평화를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회복이 있으려면 공의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반역했던 그 인간이 잘못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렇게 공의가 세워져야지 진정한 평화가 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이 공의를 회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도덕적인 능력이 없습니다.
공의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 죄에 대한 대가, 반역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한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치르신 대가는 없었다.
하지만 반역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십자가라는 대가를 치르셨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문장은 성경의 핵심을 너무나도 잘 담고 있습니다.
기독교 진리를 변증하는 데 있어서 C.S. 루이스는 정말로 천재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기 위해서는 치르신 대가가 없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세상을 멋지게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반역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죄에 빠진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지은 그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 보열로 십자가의 보혈로 예수님은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죄로 인해서 깨어졌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여러분, 죄는 분리를 가져옵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분리되었고 사람과 사람 사이가 분리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갈등이 있는 이유는 이기심과 욕심 때문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화평을 가져왔습니다.
십자가로 인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평케 되었고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화평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놀라운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이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지난 주간에 산불 피해를 당한 교회를 섬기고자 이제 마지막으로 안동 지역을 다녀왔습니다.
이번에는 꿈너머 꿈 프로젝트를 섬겼던 우리 대구 지역 목사님들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안동에 가니까 산불로 사택이 전소되고 살림살이를 모두 다 잃어버린 그 목사님을 만나서 위로하고 왔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산불로 집도 잃고 살림도 다 잃어버렸지만 그보다 더 큰 사랑과 위로를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대구 경북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많은 분들이 오셔서 위로해 주시고 기도해 주셨다고 합니다.
산불이 없었다면 서로 만날 일이 없던 관계였습니다.
지역도 다르고 교단도 다르고 아무런 연관성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있다고 하니까 한 걸음에 달려와서 사랑을 전하고 위로를 전하는 아름다운 관계가 되었습니다.
구호금을 보낸 교회 중에서는 개척 교회들도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개척 교회는 본인들이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지만 오히려 어려움을 당한 산불로 피해를 당한 교회들을 위해서 섬겼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직접 깨달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저는 한국교회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한국교회가 부족한 면도 많고 문제도 많이 있지만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습니다.
주님께 받은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모습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월드비전, 기아대책과 같은 NGO에서 일하는 분들 중에서 크리스천의 비중이 월등하게 높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조건적인 그 은혜를 베푸셨으니 우리도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풀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이 세상은 죄로 인해서 깨어진 세상입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놀라운 은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미국의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관계가 성공하는 것은 죄 있는 쪽이 벌을 받아서가 아니라 죄 없는 쪽에서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이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죄 없는 쪽에서 잘못 안 한 쪽에서 긍휼과 용서를 베풀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었지만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긍율을 베푸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긍율를 베풀어야 합니다.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체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하나님께 반역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그 예수님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맡겨진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다른 종교가 말하는 구원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슬람, 불교, 힌두교가 말하는 구원은 문제가 많은 이 세상을 떠나서 완전하고 평화로운 낙원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대 근동의 세계관이었습니다.
구원은 현 상황에서 탈피해서 저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물질 세계를 선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물질은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배격합니다.
물질은 악하고 영혼은 선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모든 것은 다 아름답고 선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4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함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아멘.
물질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영혼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물질도 선하고 영혼도 선합니다.
기독교는 물질 세계를 선하게 보는 유일한 고등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는 물질 세계를 악하게 보고 그로부터 탈피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물질 세계를 탈피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 세계가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을 가리켜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구원관입니다.
왜 그럴까요?
다른 종교는 창조주와 구원자를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다른 종교에서는 명확한 창조주와 구원자가 없는 경우가 더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불교에는 명확한 창조주의 개념이 없습니다.
이슬람에는 기독교와 비슷한 창조주의 개념은 있지만 구원자 개념이 없습니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하마드는 구원자가 아닙니다.
그는 알라의 계시를 받아서 쿠란을 적었을 뿐입니다.
그러면 무슬림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까요?
쿠란 안에 있는 계명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이슬람에는 구원자의 개념이 없고 자기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오직 기독교에만 명확한 창조주가 있고 명확한 구원자가 있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창조주와 구원자가 동일한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다른 종교는 이 세상을 탈피해서 낙원으로 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천국이 이 땅 가운데 임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세상을 탈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회복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기독교만이 명확한 창조주와 구원자를 말하고 있고, 또한 창조주와 구원자는 동일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10절 함께 읽겠습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버리고 탈출해서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탈락한 이 땅이 변화되고 회복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정말로 결혼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집에서 탈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버지,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가 너무 싫었기 때문이지요.
또 다른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도 결혼을 하고 싶었습니다.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 결혼하는 것과 집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타락한 이 세상에서 탈출하는 것이 구원의 진정한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 성경이 증거하는 구원은 새 하늘과 새 땅의 회복입니다.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이 땅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또 내가 봄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아멘.
마지막 때에 완성될 구원은 창조 세계 전체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오염되고 타락한 온 우주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구원입니다.
성경의 메타내러티브(Metanarrative)는 창조 타락 구속으로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구속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요?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로 어디까지 구속하실까요?
구속의 범위는 탈락의 범위와 일치합니다.
인간의 죄로 어디까지 타락했습니까?
인간의 죄로 창조 세계 전체가 타락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은혜로 어디까지 구속될까요?
타락한 창조 세계 전체가 구속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각 사람, 가정과 학교, 나라와 민족 뿐만 아니라 창조 세계 전체까지 구속되고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거룩한 일과 세속적인 일을 구별하는 것은 성경적인 관점이 아닙니다.
교회 사역은 거룩한 일이고, 세상에서의 지금은 세속적인 일이라고 구분하는 것은 절대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전도, 선교 같은 교회 사역이 중요한 만큼 직장과 사업에서의 일도 동일하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도 하나님의 나라이고, 이 세상도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하나님께서 세우셨고, 이 세상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한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가급적이면 '세속적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세속적인'이란 단어가 영어로 secular 입니다.
세큘러의 반대말은 spiritual 이거든요.
'세속적인'이라는 단어의 반대말은 '영적인' 일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은 세속적이고 어떤 일은 영적이라고 구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족을 위해서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세속적인 일입니까? 영적인 일입니까?
회사에서 일하는 것은 세속적인 일입니까? 영적인 일입니까?
이런 식의 질문은 옳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secular 라는 단어 대신에 우리가 사용해야 하는 단어는 sinful 입니다.
sinful 하면은 죄가 많은, 죄된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는 것은 죄된 일을 행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하는 그 일을 소홀히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크리스천이 세상에서 사업도 해야 되고, 경영도 해야 하고 연구도 해야 합니다.
크리스천 중에서 의사도 나와야 되고, AI 전문가도 나와야 되고, 정치인도 나와야 합니다.
모든 크리스천이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일은 영적이고, 어떤 일은 세속적이고 이러한 구분은 없습니다.
오직 죄된 일과 거룩한 일만 있을 뿐입니다.
사업을 하고 경영을 하고 연구를 할 때 거룩한 방법으로 하면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타락한 세상에서 빠져나와서 천국으로 탈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그 일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모든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9절, 21절 함께 읽겠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아멘.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을 또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인간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셨고, 또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그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직분을 받은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이 세상이 회복되도록 기도하고 헌신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을 회복하는 그날까지 우리에게 맡기신 그 사명에 충성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6WBJSKZ60W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