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만드는 것과 낳은 것
모든 이들이 제4부에서 다루려는 내용은 빼는 게 좋겠다는 경고를 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일반 독자들은 신학을 원하지 않아. 일반 독자들한테 평범하고 실제적인 종교 이야기를 해야 한다구"라고 말했지요.
저는 그들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일반 독자들이 그렇게 우둔한 사람들이라고는 생각지 않는 탓입니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며,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에 대해 가능한 한 가장 명확한 개념들을 얻고 싶어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어린아이 취급을 받아야 합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왜 신학이라면 고개부터 내젓는 사람들이 있는지 이해할 만합니다.
한번은 영국 공군 부대에서 신앙 강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꽤 고집 있어 보이는 한 노(老)장교가 일어서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한테는 전부 쓸모없는 얘기요.
잘 들으시오, 나도 신앙인이오.
나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알고 있소.
그분을 느끼기도 했소. 어느 날 밤 혼자 사막에 있을 때였는데, 정말 신비했소. 그렇기때문에 선생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그 깔끔하지만 하찮은 교리와
공식들을 믿지 않는다는거요.
진짜를 경험한 사람한테 그런 건 다 시시하고 사소하고 현학적이며 실제적이지 못한 말로 들릴 뿐이니까!"
저도 어떤 점에서는 그 장교의 말에 동의합니다.
저는 그가 사막에서 정말 하나님을 경험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체험을 한 사람이 기독교의 신조들을 접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실제 세계가 덜 실제적인 세계로 바뀌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해변에서 진짜 대서양을 본 사람이 집에 돌아와 대서양 지도를 볼 때 실제 세계가 덜 실제적인 세계로 바뀌듯이, 눈앞에서 넘실대던 파도가 한낱 색칠한 종이조각으로 바뀌듯이 말이지요.
그러나 바로 여기에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지도가 색칠한 종이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무리 사실이라 해도, 여러분이 지도에 관해 기억해야 할 사실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그 지도가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진짜 대서양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그 지도의 이면에는 해변에서 바다를 본 당신의 경험 못지않게 생생한 경험의 덩어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또한 당신의 경험은 바다를 고작 한 번 흘낏 본 것이 전부지만, 지도는 서로 다른 경험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둘째는, 여러분이 어딘가 가고자 할 때는 지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해변을 거니는 데 만족한다면 지도를 보느니 해변에서 직접 바다를 보는 편이 훨씬 재미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가고 싶다면 해변을 거니는 것보다는 지도를 보는 편이 훨씬 유용할 것입니다.
신학은 지도와 같습니다.
단순히 기독교 교리를 배우고 거기에 대해 배우고 거기에 대해 생각하는 데서만 멈춘다면, 그 장교의 사막 경험보다 생생하지도 않고 흥미롭지도 못할 것입니다.
교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일종의 지도입니다.
그러나 그 지도는 정말 하나님을 만났던 수백 명의 경험 (여기에 비하면 여러분과 제가 혼자 경험하는 흥분이나 경건한 감정들은 아주 초보적이고 혼란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이 더 먼 곳에 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지도를 써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사막에서 그 장교에게 일어난 일은 분명 흥미진진한 실제 경험이긴 하지만 열매는 없습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막연한 종교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는 식의 것들)가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이유입니다.
그런 종교에는 흥분만 있을 뿐 결과가 없습니다.
해변에서 파도를 구경할 때처럼 말이지요.
그런 식으로 대서양을 연구한다고 해서 뉴펀들랜드에 갈 수 없는 것처럼,
꽃이나 음악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는 것만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바다에 가 보지 않고 지도만 들여다본다고 해서 어디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도 없이 무조건 바다에 나가는 것 또한 그리 안전한 일은 못 되지요.
다시 말해서 신학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특히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의 교육수준도 낮았고 토론도 흔치 않았으므로 하나님에 대해 간단한 개념 몇 가지만 알아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릅니다.
누구나 글을 읽고 토론을 듣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신학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아무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잘못된 개념 (여러 가지가 뒤섞인 해롭고 낡은 개념)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새로운 것인 양 자랑스레 내보이는 개념들의 상당수는 진짜 신학자들이 수세기전에 이미 검토하여 폐기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영국에 유행하는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곧 퇴보를 의미합니다. 오늘날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 현상을 잘 살펴볼 때, 요즘 유행하는 기독교의 개념이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도덕적 스승으로서 그의 권고를 따른다면 더 행복한 세상에서 살게 된다는 말은 맞습니다.
아니 그리스도까지 갈 것도 없지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공자의 말만 따라도 지금보다 훨씬 더 잘 살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위대한 스승들의 말을 한 번도 따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이라고 해서 따를 것 같습니까? 다른 스승은 따르지 않아도 그리스도는 따를 것 같습니까?
그가 가장 훌륭한 스승이기 때문에?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초보적인 교훈도 지키지 못하는 터에 어떻게 더 수준 높은 교훈을 지키겠습니까?
기독교가 또 하나의 좋은 권고에 불과하다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좋은 충고라면 지난 4천년간 부족함 없이 들어왔으니까요.
거기에 하나가 더 추가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진짜 기독교 서적들을 읽어보면, 이런 대중적 기독교와 전혀 다른 내용을 말하고 있음을 즉시 알게 됩니다.
그 책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그 말이 무슨 뜻이든 간에) 말합니다.
그 책들은 그를 믿는 자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그 말이 무슨 뜻이든 간에) 말합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죽음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구원했다고(그 말이 무슨 뜻이 든 간에) 말합니다.
이런 말들이 어렵다고 불평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독교는 다른 세계, 우리가 만지고 듣고 보는 이 세상 이면의 무언가에 대해 말한다고 스스로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 주장이 거짓이라면 모르겠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기독교가 하는 말은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적어도 같은 이유로 현대 물리학이 어려운 것만큼) 없습니다.
기독교의 주안점들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붙어 있기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이는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가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기독교의 주된 개념 중 하나가 아닙니까?"라고 묻습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인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를 존재하게 하시고 사랑하시며 돌보신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의 아버지 같은 분이지요.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말하는 데에는 틀림없이 무언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우리를 신학의 중심부에 직면시킵니다.
기독교 신조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되신 것이 아니라 나셨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모든 세계가 창조되기 전에 아버지에게 나셨다'는 말이 덧붙어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을 때 동정녀의 아들로 태어나셨다는 사실과는 아무 관계가 없음을 분명히 아시겠지요?
지금 우리는 동정녀 탄생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연이 창조되기 전,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일어났던 어떤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세계가 창조되기 전에' 그리스도는 창조되신 것이 아니라 나셨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현대 영어에서는 낳다 (begetting)나 태어나다 (begotten)라는 말을 쓰지 않지만 그 뜻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낳는다는 것은 아버지가 된다는 뜻이고, 창조한다는 것은 만든다는 뜻이지요. 이 두 단어의 차이는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낳는 것은 여러분과 같은 종류에 속한 것입니다.
즉 사람은 사람의 아이를 낳고, 비버는 비버 새끼를 낳으며, 새는 새 새끼로 부화될 알을 낳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만드는 것은 여러분과 다른 종류에 속한 것입니다.
즉 새는 둥지를 만들고, 비버는 댐을 만들며, 사람은 라디오를 만듭니다.
물론 사람은 라디오보다는 더 자기를 닮은 것, 이를테면 조상(彫像)을 만들 수 있습니다.
실력 있는 조각가라면 정말 사람과 흡사한 조상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 조상이 진짜 사람이 될 수는 없지요.
조상은 숨을 쉬거나 생각할 수 없습니다.
조상은 그저 사람과 흡사하게 생겼을 뿐입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가 첫 번째로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낳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낳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창조하시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들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사람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것과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어떤 점에서는 하나님을 닮았지만 하나님과 같은 종류에 속한 존재는 아닙니다.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의 조상이나 초상화에 가깝습니다.
조상은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긴 하지만 살아 있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하나님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비슷한 점은 있지만 (이제 곧 설명하려는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의 생명과 똑같은 종류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닮은 점 첫 번째를 먼저 살펴봅시다.
사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에는 어느 정도 하나님과 비슷한 점들이 있습니다.
우주는 광대하다는 점에서 하나님과 비슷합니다.
물론 우주의 광대함은 하나님의 광대함과 종류가 다르지만, 그 광대함에 대한 일종의 상징, 또는 그 광대함을 영적이지 않은 용어로 바꾸어 놓은 번역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질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과 비슷합니다.
물론 물질 에너지 역시 하나님의 능력과는 그 종류가 다르지만 말입니다. 식물의 세계는 살아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생물학적 의미의 생명 또한 하나님의 안에 있는 생명과는 종류가 다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일종의 상징 또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지요.
동물에 이르면 생물학적 생명 외에도 다른 닮은 점들이 발견됩니다.
예컨대 곤충의 맹렬한 활동성이나 번식력은 아주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의 멈추지 않는 활동성과 독창성을 닮았습니다.
또 고등 포유동물들에게는 본능적인 애정의 초기 형태가 보입니다.
물론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과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비슷합니다.
풍경화는 평평한 종이에 그린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풍경과 '비슷한' 것처럼 말입니다.
가장 고등한 동물인 인간에 이르면 우리가 아는 한 가장 완전하게 하나님과 닮은 점이 나타납니다 (어쩌면 다른 세계에 인간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피조물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인간은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사랑하며 추론합니다.
이처럼 생물학적 생명은 인간에 이르러 우리가 아는 바 최고 수준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적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영적인 생명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으로서 생물학적 생명과 다른 생명)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다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생명을 같은 종류로 생각한다면, 우주의 '광대함'과 하나님의 '광대함'을 같은 종류로 생각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사실 생물학적 생명과 영적인 생명 사이에는 너무나 중대한 차이가 있기때문에, 저는 이 두 가지를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부르려 합니다.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생물학적인 종류의 생명, 늘 소모되고 쇠퇴하는 성질이 있어서 공기가 물이나 음식 등을 통해 끊임없이 자연의 보조를 받아야만 유지 되는 생명은 바이오스 (Bios)입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안에 있는 영적인 생명, 자연 세계 전체를 만들어 낸 생명은 조에 (Zoe)입니다.
바이오스는 어떤 그림자나 상징처럼 조에를 닮았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유사성은 사진이나 풍경이나 조상과 사람 사이에 나타나는 유사성과 같은 종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바이오스를 가졌다가 조에를 갖게 된다는 것은 석상이 진짜 사람으로 변하는 것만큼이나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정확히 기독교가 말하는 바입니다.
이 세상은 위대한 조각가의 작업실이고, 우리는 그 조각가가 만든 조상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작업실에는 우리 중 일부가 언젠가 생명을 얻으리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습니다.